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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Sep 20. 2021

이낙연식 화법, 지금은 왜 안 통하나?

2017년 총리 시절 그의 화법은 큰 화제를 모았다.


이낙연 후보와는 동향이다. 이낙연 후보는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다. 같은 고향 출신에 동종 업종 종사자였으니 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안 친하다. 안 친한 이유는 당연히 내가 썼던 기사 때문이고, 그는 전화해서 '기사를 왜 고 따위로 쓰느냐, 기사 쓰는 법 ABC는 알고 있냐' 정도의 강한 항의를 했었다. 주목하던 매체에서 가깝다고 생각했던 기자에게 불리한 기사가 나갔으니 섭섭할 만도 하다. 하지만 나는 사과하지 않았다.


기자업을 '졸업'하고 돌이켜보니 나는 잘 나갈 사람들과 사이가 안 좋아지는 놀라운 장점이 있는 것 같다. 이낙연 전 총리와 그랬듯이 정세균 전 총리와도 그런 적이 있고 손석희 JTBC 사장과도 악연이 있다. 그들은 거칠게 따졌지만 역시나 사과하지 않았다. 당시 내가 썼던 기사나 내가 취한 행동은 합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고 사리에 맞지 않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잘난 놈들 속 좁다는 말 틀리지 않구나'라고 생각했을 뿐.


4년 전 '이낙연식 화법'에 대해 정리해둔 글이 있어서 '명절 정치썰 떡밥'으로 올려본다. 이재명 후보에게 공세를 취하다 후폭풍을 맞이한 이낙연 후보 측에서 안정론을 들고 나오는데, 국정 지지도가 40%를 밑돌고 부정적 답변이 55%가 넘는 상황의 '정권 심판 선거'에서 안정론을 들고 나오는 것은 안정적으로 망하는 길일 수 있다. 물론 당내 경선 때의 구호니 본선 때는 바뀔 수 있지만 어쨌든 경선 전략이 왔다갔다 하는 것 자체가 안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화천대유 스캔들이 부각되고 이낙연 후보의 정치적 기반인 호남 성적표가 사실상의 승부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지금처럼 이재명 후보가 수성하고 이낙연 후보가 추격하는 구도가 아니라 이낙연 후보가 수성하고 이재명 후보가 추격하는 양상이라면 안정론도 나름 의미가 있었겠지만, 현재의 구도에서 안정론은 한가해 보인다. 암튼 4년 전, 그의 리즈시절 화법을 다시 들여다본다.



4년 전 이낙연 총리의 답변에는 노련함이 있었다.


# 질문에 담긴 떡밥을 물지 않는다.

(질문에 담긴 전제를 꿰뚫어 본다. 질문에 답변하면 전제를 인정하는 것이 되어버리는데, 에둘러 이를 피한다.)


박대출 자유한국당 의원, “최근에 MBC KBS가 불공정 보도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이 총리, “꽤 오래전부터 (MBC, KBS를) 잘 안 본다. 좀 더 공정한 채널을 본다”


# 동문서답할 때는 슬쩍 잽을 날린다.

(일종의 폭탄 돌리기. 이렇게 해야 동문서답한다는 추궁을 피할 수 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이 얻은 게 뭔가. 핵과 미사일인가”


이 총리, “지난 9년간 햇볕정책과 균형자론을 폐기한 정부가 있었다. 그걸 건너뛰고 이런 질문을 받는 게 뜻밖이다”


# 상대방의 ‘논할 자격’을 논한다.

(쇼펜하우어도 ‘논쟁에서 절대로 지지 않는 방법’에서 추천했던 방식. 네가 그럴 자격이 있어?라고 물으면서 상대방의 약점에 대해서 환기하게 하는 전술)


황주홍 국민의당 의원, “한국은 삼권분립 국가가 아니다, 제왕적 대통령 1인제”


이 총리 “대통령이 지명한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가 인준받지 못한 사태가 있었지 않았는가. 우리는 조금 전에 삼권분립을 체험했다. 삼권분립은 살아 있다”


# 상대방의 논리를 역이용한다.

(아니 그러니까 너희들의 논리대로 하자면 이렇게 되는 것이잖아, 그게 뭐가 이상한 거야?라고 되묻는 방식으로 피한다.)


이주영 자유한국당 의원, “북한이 핵과 미사일 도발을 하고 있는 마당에 전시작전권 조기환수 추진 등 정부의 대북정책이 안이하고 문제가 있다”


이 총리 “이는 문 대통령의 발명품이 아니다.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 사이에 합의된 것이 한글자도 바뀌지 않고 다시 프린트된 것이 이번 한·미 공동선언이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중단을 비롯한 정부 원전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했을 때도 이런 식으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지난 대선 때 주요 후보 다섯 명 가운데 네 명이 신규 원전 건설 중단과 설계수명 연장 금지를 공약했다.”


# 상대방의 주장을 크게 확장한다.

(이것 역시 쇼펜하우어가 얘기한 논쟁에서 절대로 지지 않는 방식 중 하나인데 상대방의 주장을 끝없이 확장해서 다른 사람이 내 비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 기술은 상당히 여러 번 사용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 “한·미 동맹관계는 금이 갈 대로 갔다. 오죽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통화하며 한국이 대북대화를 구걸하는 거지 같다고 말했다는 그런 기사가 (일본에서) 나왔겠느냐”


이 총리, “김 의원이 한국 대통령보다 일본 총리를 더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학용 자유한국당 의원, “일본 총리는 시도 때도 없이 (미국과) 통화를 한다더라. 그런데 우리나라는 한미동맹이 와해 직전이다”


이 총리, “한국 국민의 안전에 대해 아베 총리가 더 걱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 “백악관은 한국정부가 미국산 첨단무기를 대량 구매하는 것을 승인했다고 발표했다. 우리 정부는 왜 이 사실을 숨기느냐”


이 총리, “구체적인 무기구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박 의원이 한국 청와대보다 미국 백악관을 더 신뢰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 이쪽의 잘못은 작게 축소한다.

(이런 해명은 사실 ‘꼬리 자르기’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실무진의 책임을 구체화하더라도 도의적 책임을 명시하는 것이 정공법이다. 이번에는 좀 강하게 답한 것인데, 국면이 국면인지라 용인된 것으로 보인다.)


이우현 자유한국당 의원 “방송장악 문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박근혜 정부였다면 탄핵한다고 했을 것”


이 총리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보지만 (문건을 작성한) 실무자들이 탄핵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 사과는 내용적 사과가 아닌 표현적 사과로. 거절할 때는 예의를 지키고, 해결안은 상대방을 끌어들여서. 

(사과를 구체적으로 해버리면 나중에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사과는 최대한 두루뭉수리하게 하는 것이 유리하다. 반면 거절할 때는 최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 좋다. 하지만 해결안은 상대방을 끌어들여서 ‘이제 너도 똑같이 책임져야 한다’라고 덤터기를 씌운다.)


유영진 식약처장 임명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아시다시피 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한 바 있고, 대통령 비서실장이 사과했고, 대통령이 인사 검증 시스템에 대한 보완을 지시했다.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엄중히 (인사 검증 시스템을 보완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시정되리라 기대한다. 지나간 몇 달 동안 국민의 따가운 질책을 뼈아픈 교훈으로 삼겠다.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왕 여야 의원들이 검증특별위원회를 만들어 가동했으니 현실적인 기준을 만들어주시면 좋겠다”


# 내용을 재해석해서 대중의 언어로 포장할 줄 안다.


이 총리는 실무진이 준비한 답변서에 의존하기보다는 현장에서 자신이 자체 판단해 답변하는 게 과거 총리와 다르다. 배재정 총리 비서실장은 통화에서 “실무진은 수치로 뒷받침하는 등 두루뭉술하게 답변을 준비한다. 자료를 사전에 숙지한 이 총리는 의원 질문을 들으며 즉석에서 함축적으로 적절한 내용으로 대응한다”라고 설명했다.


# 큰 언덕에 기댈 줄 안다. 

(박지원과 비슷한 점이다. 스스로 빛나는 햇빛 정치인이 아니라 반사해서 빛을 내는 달빛 정치인으로서의 한계를 잘 알고 처신한다.)


큰 언덕이 뒤에 있을 때 그 언덕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고 있다.


김대중이라는 언덕, 노무현이라는 언덕, 문재인이라는 언덕이 뒤에 있을 때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재량권을 활용했다.


# 국면을 활용할 줄 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이게 가능한 곳이 정치다. 아 다르고 어 다를 뿐만 아니라 그때 아 했을 때와 지금 아 했을 때 다를 수 있는 것이 정치다. 현 국면에서 대중이 원하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이 총리가 주목받은 시점은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인준안 부결로 야당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가득했던 시점이었다. 사이다 답변으로 야당에 대한 반감을 해소시켜주면서 급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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