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의 주도적 심상은 아득하다는 것이다. 그저 아득하고 막막하다. 바다 그리고 섬, 바다 그리고 섬, 바다 그리고 섬이 무한 반복된다. 해변에 서도 갯벌에 서도 혹은 도로에 차를 멈추고 서도 아니면 전망대에 올라서도 그저 바다와 섬이 반복될 뿐이다. 신안에서는 특정 여행지나 시설보다 이 아득한 심상이 중요하다. 닿을 수 있지만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먼 섬, 해무가 낀 아침과 노을 진 석양의 모습이 수시로 변화하는 신안 바다의 아득함을 즐겨야 한다.
그래서 신안의 풍경은 파노라마다. 스마트폰 파노라마 기능으로 볼 수 있는 긴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여수나 통영 등 섬이 많은 지역은 제법 있지만 신안의 섬처럼 아득하고 그윽하게 펼쳐지는 곳은 드물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런 곳은 아직 보지 못했다. 신안의 섬은 무한의 공간을 상상하게 하고 그곳에서 무심히 시간을 흘려보내도록 이끈다.
기암절벽의 풍경을 중시하던 시절에는 그렇게 아득하고 그윽한 풍경이 밋밋하고 하찮아 보였겠지만, ‘바쁜 현대 도시인’들에게는 이만한 풍경 치유가 없다. 그래서 ‘도시인을 위한 자발적 섬 유배’의 첫 유배장으로 택한 곳도 신안의 섬이었다. 유배라는 이름의 힐링과 웰빙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게 해 주었다.
# 배가 아니라 자동차로 섬을 여행한다?
신안을 여행할 때 유념할 것이 있다. 육지의 잣대로 들이대면 신안은 군 단위 기초 지자체가 맞지만 바다의 잣대로 들이대면 달라진다. 세종특별자치시와 제주특별자치도와 마찬가지로 신안섬특별자치도로 불러줘야 한다. 지도를 펴고 신안군의 영역을 따라가 보면 납득할 것이다. 차가 아니라 배로 이동해야 해서, 다른 군 단위 지자체는 1박2일이면 부족하지만 대충은 돌아볼 수 있지만, 신안은 아니다. 최소 1주일이다. 이것도 핵심 섬만 돌아볼 때의 경우다.
그래서 신안의 섬을 여행하는 방식으로 추천하는 것이 바로 자동차 드라이브다. 압해대교 천사대교 등 연륙교를 통해 신안의 섬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자동차를 타고 길게 늘어선 섬을 사열하며 질주할 수 있다. 일출과 일몰을 바다와 바다 사이에서, 섬과 섬 사이에서 맞이하는 풍경의 사치는 신안이 아니면 누릴 수 없다. 차도선에 차를 싣고 가서 연도된 섬과 섬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 내비게이션 밖에서 만나는 비경
신안군은 북부권/압해중부권/흑산·홍도권/비금·도초권/하의·신의권으로 나뉜다. 이중 흑산·홍도권과 비금·도초권 그리고 하의·신의권은 오직 배로만 갈 수 있다. 북부권과 압해중부권은 연륙이 되어 있는 곳이어서 자동차 드라이브로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빠듯하게 돌면 1박2일도 가능하지만 충분히 보려면 2박3일 정도는 필요하다. 연륙교와 연도교 그리고 노둣길과 부교를 지나며 하루에 10여 곳의 섬을 맛볼 수 있다.
2박3일 신안 섬 자동차여행 일정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첫째 날은 신안군청이 있는 압해도와 천사대교 넘어 안좌/팔금/암태/자은도를, 둘째 날은 증도/사옥도/송도/지도를, 셋째 날은 병풍도/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를 추천하겠다. 이 동선으로 이동하면 차도선을 세 번 타게 되는데 대부분 1시간 이내의 짧은 거리의 내해다. 배가 취소될 가능성은 낮은 선로다.
자 출발이다. 일단 차에 구비할 것이 있다. 편안한 캠핑 의자와 언제 어디서든 커피를 내릴 수 있는 드립백과 온수다. 가끔 마주치는 철새 떼를 관찰할 수 있는 쌍안경도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신안 섬 드라이브의 팁 몇 가지. 하나, 가로수를 주목하라. 애기동백, 후박나무 등 육지의 그것과는 클래스가 다르다. 둘, 아침과 석양에 주로 움직여라. 이 세상 풍경이 아닌 풍경과 마주칠 가능성이 크다. 셋, 감이 오면 내비게이션 밖으로 수시로 벗어나라. 그래서 섬 곳곳을 둘러보라. 뜻밖의 비경과 마주칠 수 있다.
# 석양을 가르는 드라이브 - 압해도와 안좌/팔금/암태/자은도
압해도에 가면 먼저 천사섬분재공원에 둘러보길 권한다. 분재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이곳 애기동백 군락지는 볼만하다. 분재의 대상이 된 나무들을 보면 지난 시절 남도의 ‘플렉스’들이 누린 수목 사치를 엿볼 수 있다. 바로 옆의 저녁노을미술관은 말 그대로 노을 보기 좋은 곳이다. 압해도를 안좌/팔금/암태/자은도로 잇는 천사대교는 이곳 바로 옆 송공항 옆에서 출발한다.
천사대교 넘어가 만날 수 있는 섬 중에서 맨 아래 있는 섬이 안좌도다. 안좌 읍내에 김환기 생가가 있는데 미술관이 함께 있지 않아 조금 아쉬웠다. 생가에서 조금 더 읍내 쪽으로 가면 편의점이 하나 나온다. 4개 섬에서 처음 생긴 편의점이라고 했다. 섬의 아이들이 한 뼘 도시를 만끽하기 위해 자전거로 한 시간을 달려 이 편의점에 오곤 했다고 한다. 도시를 동경하는 그들에게 편의점은 최소 도시였던 셈이다(지금음 섬마다 편의점이 들어섰다).
안좌도 바로 위 팔금도의 특산물은 멀베리다. 이곳을 지나다 보면 ‘멀베리의 섬’이라는 간판을 볼 수 있다. 멀베리는 꾸지뽕이다. 찾아보니 꾸지뽕을 재배한 장웅조 씨가 연간 소득 8억 원을 올린다는 보도가 있었다. 꾸지뽕은 담금술(침출주)의 좋은 재료다. 다른 담금술과 다르게 단맛과 신맛이 잘 어우러져 나온다. 다음에 팔금도에 가면 한번 찾아볼 예정이다. 팔금도에는 4개 섬 중 유일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인 ‘고산’이 있다.
세 번째 섬 암태도는 일제강점기 소작쟁의가 벌어졌던 유서 깊은 섬이다. 요즘은 인스타그램 성지가 되었는데 동백나무 할매/할배 벽화 때문이다. 사실 가장 통행이 삼거리에 있는 집이라 사진을 찍기에 위험한 곳인데 섬의 추억을 담아가려는 사람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암태도와 노둣길로 연결된 추포해수욕장은 잠시 차를 멈추고 커피를 내려 마실만한 곳이다. 석양에 마시면 더욱 좋고. 암태도에는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지은 체육관이 있는데 목욕탕도 운영해서 섬 여행의 피로를 씻을 수 있다.
자은도는 대파의 섬이다. ‘대파 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자은도 서쪽 지역은 동쪽 지역에 비해 수익이 적었는데 대파 농사로 역전했다고 한다. 대파가 보리처럼 끝도 없이 펼쳐진 대파밭을 볼 수 있다. 자은도는 4개 섬 중 가장 관광 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해변과 해송이 좋아 둔장마을 해변부터 분계해수욕장까지 해변 트레킹로가 유명하다. 두봉산 등 산에 올라 바다를 조망하는 트레킹도 좋다.
# 컬러 마케팅의 정수, 퍼플섬
신안 섬 중에서 요즘 가장 힙한 퍼플섬(반월도와 박지도)은 '퍼플교'로 안좌도와 연결되어 있는 섬이다. ‘내 발로 걸어서 목포까지 가고 싶다’는 섬할매의 바람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 만들어진 인도교는 이제 ‘색깔 마케팅’의 전설이 되었다. 퍼플교는 암태도 동백나무 벽화, 자은도 무한의 다리와 더불어 천사대교를 넘어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퍼플교가 다소 인위적이어서 테마파크같다는 사람도 있지만 외로운 섬의 몸부림으로 이해해주자. 이왕 퍼플교를 건널 생각이면 시간을 넉넉히 잡고 반월도와 박지도에 깊숙이 들어갔다 오길 추천한다. 박지도에서는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담쟁이가 빈집을 감싼 모습이 마치 예술작품의 오브제로 보인다. 반월도는 드물게 문자향이 느껴지는 섬으로 출사한 사람이 많은 섬으로 위엄 있는 노거수가 마을 어귀에서 손님을 맞는다.
# 신안의 맛을 즐기다 - 증도/사옥도/송도/지도
중요한 여행팁, 자은도와 증도 사이에 연락선이 다닌다. 자은 고교터미널과 증도 왕바위터미널 사이를 운항하는데 차도선이기 때문에 차를 싣고 이동할 수 있다. 배로 10분 남짓이면 가는 이곳을 도로를 따라 돌아가면 거의 두 시간이 걸린다. 증도는 엘도라도 리조트가 들어선 이후 신안군에서 가장 숙박시설이 많이 들어선 섬이다. 숙박시설이 많은 것은 풍광이 좋은 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증도의 짱뚱어다리에 일출 무렵 갔는데 해무가 적당히 껴서 육지에서는 보기 힘든 풍광을 볼 수 있었다. 겨울이라 짱뚱어는 뛰지 않았지만 갯벌 뒤 은은한 섬의 풍경이 마치 수묵화 같았다. 이곳과 함께 꼭 추천하고 싶은 곳은 태평염전이다. 우리나라에서 단일 염전 중에서는 가장 큰 곳이라는데 우리 염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태평염전에서 운영하는 소금 관련 제품 판매점도 구색이 풍부해서 좋았다.
사옥도는 석양을 조망하기 좋은 섬이다. 섬의 전망대와 지도대교는 석양 조망 명소로 꼽힌다. 지도에는 젓갈타운이 있는데 젓갈타운 부속 건물에 있는 마을식당이 맛집으로 정평이 나있다. 마을식당에서 바다 쪽으로 데크가 깔려 있는데 밥 먹고 산책하기 좋다. 송도는 송도항 입구 점포에서 말리고 있는 반 건조 민어(건정)가 장관이었다.
# 달의 시간을 걷다 - 병풍도/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
자은도에서 증도로 넘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송도에서 병풍도는 차도선에 차를 싣고 이동하면 된다. 병풍도/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는 불편한 섬이다.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를 연륙교라 하고 섬과 섬을 연결하는 다리를 연도교라 하는데 4개 섬에는 이런 것이 없다. 노두길이라고 물이 빠지면 다리가 되고 물이 들어오면 잠기는 다리로 연결되어서 물때를 맞춰 이동해야 한다.
그래서 이 섬에 오면 해의 시간뿐만 아니라 달의 시간도 맞춰 살아야 한다.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하는 노두길이 달의 시간에 맞춰 열리고 닫히기 때문이다. 노두길은 천천히 잠기고 천천히 열린다. 달의 시간에 맞춰 여행을 하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섬을 여행한다는 건, 다른 시간을 살아보는 것이다. 보통 섬에 가면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하는데 그 멈춘 시간에 맞춰 살아보는 경험이 소중하다.
4개의 섬 중에서 병풍도는 따로 논다. 가진 것이 많아서다. 병풍바위가 유명하고 경관 농업으로 맨드라미밭을 조성해서 볼거리가 많다. 퍼플섬처럼 ‘가고 싶은 섬’ 사업이 적극적으로 진행된 곳이다. 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는 ‘순례자의 길’이 조성된 후에 조명받고 있다. 예술가들이 12사도를 모티브로 기도소 혹은 공회당을 지었는데 이곳을 순례하는 트레킹이다. 걷다 보면 마음이 정화된다.
트레킹 중 휴식하기에 좋은 곳은 코스 중간에 있는 소기점도에 게스트하우스다. 새로 지어서 깔끔해서 숙소로도 좋고 식사도 가능하기 때문에 섬맛을 즐기며 쉬어가기에 좋다. 종점에 해당하는 소악도에 부녀회장님이 하는 소악도민박이 있는데 손맛이 좋으시다. 간단한 분식과 김국과 김전 등을 맛볼 수 있다.
기점소악도 순례길은 보름에 맞춰 가길 바란다. 우뚝한 봉우리가 없이 완만한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는 달빛 트레킹을 하기에 좋은 곳이다. 작은 초 하나 들고 가서 공회당 안에서 피우면 신앙과 별개로 안식을 얻을 수 있다. 순례자의 길은 무리해서 완주하려고 단박에 걷지 말고, 반은 낮에 걷고, 반은 밤에 걸으며 천천히 만끽하는 것이 좋다. 기점소악도에 여러 번 다녀왔는데 모든 걸음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