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량>의 흥행이 파죽지세다. <한산>에서는 좀 주춤했지만,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의 기세를 보니 <명량> 1700만 흥행 신화를 무난히 이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봄>에 이어 바로 천만 신화를 <노량>이 이어가면 코로나19로 수직 하락한 한국 영화산업에 이순신 같은 존재가 될 것 같다.
역사가 스포일러인 이순신 3부작을 연출하며 김한민 감독은 오직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규명하는데 초점을 맞춘다(반면 <서울의 봄>은 '이기지 못한 이유'에 초점을 맞춘다). 단지 용기가 남달라서, 애국심이 남달라서, 사병을 아껴서가 아니라 '지지 않을 이유'를 궁리하는 이순신에 초점을 맞춘다.
김한민 감독이 이순신 장군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부정치를 활용할 줄 안다는 점일 것이다. 특히 전쟁을 둘러싼 권력의 역학에 예리하다. 이번에도 고니시와 시마즈의 관계에서 그리고 진린이 취하는 입장에서 그런 부분을 부각해서 영화적 긴장을 이끌어낸다. 그의 영화에는 '죽음을 활용한 비정한 정치'의 뒷그림자를 늘 보여준다.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이순신에게 가장 뛰어난 능력은 전투 시뮬레이션 능력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적과 아군의 상황과 능력을 바탕으로 현장의 변수를 감안해 그려보는 시뮬레이션 능력에 탁월했다. 그의 전투는 대부분 그 시뮬레이션의 범위 안에 있는 전투였고.
김한민 감독의 영화는 이 시뮬레이션에 관객도 동참하게 만들어주고 영화에서 이를 스펙터클 하게 풀어가면서 재미를 준다. <명량>에서는 좁은 해협의 회오리 바다를 어떻게 전술적으로 활용할지 궁리해서 13척의 배로 맞설지 시뮬레이션한다. 천시와 지리와 인화를 최고값으로 끌어올려 불리한 형세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산>은 '장군의 한 수'에 주목한다. 실제 한산대첩은 한 시간 정도 시간 안에 끝났다고 한다. 전투로서는 압승이지만 영화적으로는 극적인 부분이 적어 단점이다. 이때 김한민 감독의 '바다 위의 성'이라는 형세를 구축하는데 주목한다. 한 시간 만에 승부가 결정지어질 만큼 학익진의 십자포화가 효과적이었던 셈인데, 드론으로 보는 듯한 해상전투씬이 이를 스펙터클 하게 표현했다.
<노량>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이길 수 있는 궁리'를 위해 '적들의 궁리'를 역이용한다. 진린의 '피할 궁리'마저도 활용한다. 여기에 자신의 '죽을 궁리'까지 포함되며 복잡해진다. 싸움의 형세가 수시로 변하는데 오직 이순신 장군의 머릿속으로만 그런 부분에까지 계산이 되어있다. 심지어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계산까지도.
<한산>과 <명량>이 개봉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국뽕 논란이 재현될 것 같다. 3부작에서 김한민 감독은 극 중 인물을 통해 늘 '국가란 절대적인 것인가'라고 묻는다. <명량>에서는 아들 이회의 물음을 통해, <노량>에서는 진린이 '어리석고 질투나 하는 왕'이라고 말하는 표현에서 이를 드러낸다. 이를 통해 이순신이 단순한 국가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규명해 준다.
<명량> <한산> <노량>은 태생적으로 국뽕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정작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국뽕적 요소에 무심했던 것 같다. 이순신 신화화에도 상대적으로도 소극적이었다. 그런데도 국뽕타령은 여전했다. 문화예술 콘텐츠에도 정치적 역학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산>을 보았을 때 감상평을 보고 ‘원균 같은 소리’나 하는 사람이 제법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가질 법한 생각을, 비범하지 않은 문장으로 토해내는 평이 많았다. 그런 평범한 성토 중에서는 '국뽕 포비아'에 기인한 것들이 제법 많았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하도 국뽕이 판을 치니 미리 예방주사를 놓으려는 사람이 많았다.
2) <한산>에서
<한산>을 보고 맨 먼저 생각난 사람은 <칼의 노래>를 쓴 김훈이었다. 김훈 선생은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할 때 딱 한 가지만 유념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부디 적장을 장수답게 그려달라고’ <명량> <한산> <노량>은 이 주문에 가장 충실했던 영화들이 아닌가 싶다. <명량>의 구루지마(류승룡 분), <한산>의 와키자카(변요한), <노량>의 시마즈(백윤식) 모두 최후의 순간까지 장수다웠다.
전작 <명량>과 마찬가지로 김한민 감독은 <한산>에서도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찾아내어 이를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 부분이다. 적들도 대비를 하고, 적들도 작전을 쓰고, 적들로 용맹스럽게 돌진하는데, 이를 감안하고 새로운 솔루션을 찾는 이순신의 모습이 돋보였다. 적도 연구를 하고, 적도 아군의 약점을 파악하고, 적도 신중하다. 하지만 이순신은 거기까지 감안하고 한 수를 더 낸다.
영화에서 이순신은 오직 이길 궁리만 한다. 마찬가지로 영화 내내 감독은 재밌을 궁리한 한 것 같다. 풍전등화의 조국을 두고 존재론적 회의에 잠기는 것이 이순신에게 사치였듯, 1000만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에게 흥행 이외의 다른 것은 사치였을 테니까. 그래서 둘 다 직진한다. 각자 달리 평가하겠지만, 이순신의 이길 궁리가 통한 것처럼, 김한민 감독의 재밌을 궁리도 통하지 않을까 싶다.
<한산>에서는 미장센과 사운드가 왜군에 집중된 점도 흥미로웠다. 수군 진지나 의상 그리고 음악까지도 왜군 쪽에 비중이 있었다.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나라와 풍전등화에 처해있는 나라의 처지 차이를 이런 미장센에도 극명하게 드러냈다. 보기에는 불편할 수 있지만, 이렇게 대비해서 현실감을 더했다. 적에게 장수 다움과 화려함을 준 영화에 국뽕 딱지를 붙이는 것은 무리수다.
3) <명량>에서
2015년 <명량> 개봉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명량>의 초대박 흥행에 대해 분석하기를, 장기 불황과 세월호 참사 등으로 국가 시스템의 문제가 부각되면서 국난 극복의 리더십을 메시아적 영웅에서 찾는 대중심리가 팽배해지며 영화의 흥행을 이끌었다고 했다.
당시 <명량>에 대한 대중적 열광을 수용하는 측면에서 여야와 진보·보수, 문화적 기호에 따라 온도 차이가 있었다. 이순신은 정치인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역사적 인물 중 하나다. 위기 국면마다 정치인들은 “‘백의종군’하는 자세로 ‘사즉생, 생즉사’의 각오로 싸우겠다”라며 지지를 호소해 왔다. 명량해전에 앞서 수군을 육군으로 흡수시키려 했던 조정에 맞선 이순신의 유명한 문장(今臣戰船 尙有十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은, 위기 국면에 몰린 정치인들이 저마다 한 번씩 인용하는 상용구처럼 되어버렸다.
영화의 내용과 흥행의 맥락으로만 보면 〈명량〉은 ‘현재 권력자’ 쪽에서 불편해야 할 영화였다. 영화에서 이순신의 아들 이회는 “아버님은 왜 싸우시는 겁니까?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아버님의 목숨까지 취하려고 했던 상감입니다”라고 말한다. 백전승장인 이순신을 사지로 몰아넣어 패전을 자초했던 당대 권력의 무능과 불공정을 비판한 대목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시점에서 〈명량〉을 보는 관객이라면 십중팔구 ‘무능한 권력’으로 박근혜 정부를 떠올리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명량〉의 흥행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측은 정부·여당이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보수 성향 정치인들은 연이어 ‘〈명량〉 관람 이벤트’를 연출하며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복제하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명량〉을 관람한 뒤 다음과 같은 소감을 대변인을 통해 전했다. “국가가 위기를 맞았을 때 민·관·군이 합동해 위기를 극복하고 국론을 결집했던 정신을 고취하고, 경제 활성화와 국가 혁신을 한마음으로 추진하자는 의미가 있다.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침체의 늪에 빠진 한국 사회를 다시 일으키는 리더십을 보이겠다.”
이순신 장군처럼 지금의 위기 국면을 극복하겠다는 의미다. 박 대통령은 당대 권력인 왕(선조)보다 이순신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명량〉 관람은 나름 절박한 정치 행위다. 세월호 참사로 땅에 떨어진 정권의 권위를 경제 활성화로 만회하고 현 국면을 돌파하려면 스스로를 ‘국난 극복 리더십’으로 상징화할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은 전군 지휘관 회의에서도 “전장에 나선 이순신 장군이 맨 앞에 서서 부하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듯이 여러분도 그런 지휘관이 되어달라”며 또다시 이순신 장군을 호출했다.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도 당 출입기자들과 함께 〈명량〉을 본 뒤 감상평을 남겼다. “역사를 보면 결국은 이기는 사람이 지도자이고, 지도자는 이겨야 한다는 걸 느꼈다. (영화가) 사즉생의 정신으로 매사에 온몸을 던져서 목숨 걸고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교훈을 줬다.” ‘이기고 봐야 한다’는 그의 세계관이 이순신 장군의 그것과 비슷한지 심히 의심스러웠지만...
반면 이 같은 이순신에 대한 정치적 상징화 작업이 당시 위기를 겪고 있는 야권에서는 오히려 드물었다. 야권 정치인 중에서는,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국민공감혁신위원장이 의원총회에서 이순신을 거론했다. “촛불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 생각에 이르니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다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심정도…, 모두 우리가 이겨내야 할 시련의 시간과 맞닿아 있다.” 야권의 차기 주자로 거론되는 정치인 중 〈명량〉과 관련된 이벤트를 벌인 경우는 없다(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영화 〈광해〉를 관람한 뒤 “인간적인 왕의 모습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을 봤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당시 <명량>에 대해서 애국주의 마케팅에 의지한 ‘국뽕영화(애국주의로 마취시키는 영화)’라는 비난이 거세게 제기되었다. SNS에 올려진 〈명량〉에 대한 비난을 보면 한국 사회에 ‘애국주의 포비아(애국주의에 대한 공포증)’가 심각하게 형성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이순신 신드롬이 파시즘으로 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닥치고 애국’이라며, 아무 데나 애국을 갖다 붙이는 세력들에 대한 경계심이 〈명량〉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명량〉을 둘러싼 호오(好惡)가 정치적 성향에 따라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은 확실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수 측은 〈명량〉의 메시지를 아전인수 격으로 끌고 와서 이미지 메이킹에 활용했다. 〈명량〉에 대한 진보 측의 시비에는 따끔하게 훈계하며 애국심을 강조했다. 진보 측은 〈명량〉의 흥행은 애국주의 마케팅과 스크린 독점 때문이라고 폄훼했다. 마치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쟁에 휘둘렸던 이순신 장군처럼 〈명량〉도 한국 사회 이념 갈등의 도마 위에서 재단되었다.
보수와 진보의 평가가 갈린다는 것은 포털 사이트 관객 평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진보 성향 누리꾼이 더 많이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다음에서는 평점 평균이 7.9를 기록한 데 비해, 네이버의 평점 평균은 8.6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룬 영화 〈변호인〉의 경우 다음의 평점 평균은 9.6으로 네이버 평점 평균 8.9보다 높았다.
그렇다면 〈명량〉은 과연 ‘애국팔이’를 하고 있을까? 혹은 〈명량〉에서 드러나는 애국주의는 시민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이며 파시즘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여기서 〈명량〉의 영화 속 대사를 들여다보자. ‘자신을 해하려는 임금을 위해 왜 싸우느냐’는 아들의 질문에 이순신은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쫓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라고 답한다. ‘백성(민중)’을 기반으로 ‘임금(권력)’이 존재한다는, 근대 민주주의의 원리가 조선시대 인물인 이순신의 입에서 나온다.
영화 속 이순신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해 있다. 영화의 배경은 이순신이 권력의 살해 위협에서 겨우 빠져나온 시기다. 이순신은 권력자가 아니라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자다. 더욱이 이순신을 둘러싸고 위협하는 것은 왜군에 그치지 않는다. 수군을 버리라는 왕, 전투를 두려워하는 장수, 탈영하려는 병사 등이 사면에서 이순신을 압박한다. 이처럼 소외된 이순신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는 주체는 정탐꾼, 물길에 밝은 늙은 어부,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소년 격군 등 평범하거나 불행한 민중들로 묘사된다. 이런 시놉시스와 인물들로부터 억압적 애국주의를 읽어내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국가라는 것이 가끔 혹은 상당한 기간 ‘폭압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 이외에 민중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따로 가능할까?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말은 야권과 진보 진영이 늘 입에 달고 다니던 테제다.〈명량〉흥행은 거대한 사회적 현상이고 열광이었다. 이를 수용하는 방식에서 그들의 정치력이 오롯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