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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Jan 05. 2021

그림이 되고 노래가 되는 여행 연출법

청년 예술가들을 위한 여행 복지를 도모해 보려고 한다

   

여행감독으로서 다시 연출하고 싶은 여행 셋을 꼽으라면 나는 ‘지리산 청년 예술가 기행’을 그중 하나로 꼽겠다. 나머지 둘은 ‘상공경도 무인도 캠핑’과 청년들과 섬의 쓰레기를 함께 치웠던 여행이 아닐까 싶다(국내여행에서 꼽아본다면). 특히 ‘지리산 청년 예술가 기행’은 여행이 예술가를 위한 복지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여행이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몇 가지 여행의 장면들이 있다.  


     


장면 하나. 볕 좋은 어느 봄날 남원 광한루원 완월정에서 가야금 연주자 하소라 씨가 창작곡 ‘춘설’을 연주하자 청년 예술가들이 귀를 기울인다.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던 시민들도 난데없는 국악 버스킹 공연에 하나둘 모여든다. 시민들의 호응에 하 씨는 앙코르 곡으로 ‘꽃빛’을 연주한다. 연주가 끝나자 동양화가 신은미 씨가 전지 두 장을 이어 붙인 큰 도화지를 완월정에 걸고 해금 반주에 맞춰 사군자를 그려나간다. 중심에는 매화를 그린다. 완월정이 선사한 감흥이 신 씨에게 춘향전을 떠올리게 했다. 춘향의 지조가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우는 매화와 닮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은은한 해금 가락과 신 씨의 유려한 붓질이 시민들의 시선을 붙든다.     



장면 둘. 지리산 둘레길 중군마을과 장항마을 사이에 있는 수송대 계곡에서 시각예술을 하는 이우광 작가가 물소리·새소리를 들으며 ‘유배’ ‘비움’ ‘멍 때리기’를 실천한다. 대자연이 주는 평온함 속에서 그는 남북 정상회담을 떠올리며 ‘평양 레지던시’ ‘두만강 비엔날레’ ‘백두, 금강 예술가 기행’을 꿈꾼다. 해금 연주자 김신영 씨는 무지개다리에 걸터앉아 수송대 계곡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김 씨는 흐르는 물에 박자를 맞춘 곡을 즉석에서 작곡하고 이를 휴대전화로 녹음한다.     



장면 셋. 청년 예술가들을 이끌던 이상윤 사단법인 숲길 상임이사가 선화사 능선의 고갯마루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지리산 반달곰들의 동물 복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지리산에 방생한 반달곰 한 마리가 경북 김천시의 수도산까지 갔다가 잡혀왔는데 과연 이것이 정당한가’ 물었다. 상위 포식자인 육식동물은 행동반경이 넓어서 지리산을 벗어날 수 있는데, 그들의 서식지를 지리산으로 묶는 것이 온당하냐는 질문이었다. 시나리오 작가 조지은 씨가 이상윤 이사의 화두에 호응하며 둘은 질문을 주고받는다. 조 씨는 이 문답으로 새로운 사유의 틀을 얻었다. 반달곰이 사는 곳에 인간이 와서 오히려 그들이 놀랄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장면 넷. 지리산이 에둘러 싸고 있어 마치 지리산의 품에 안긴 듯한 느낌을 주는 지리산 길섶 마당에서 뮤지컬 배우 황예영 씨가 〈마리아 마리아〉의 주제가 ‘당신이었군요’를 나긋이 읊조린다. 노래 몇 곡을 들려주며 자신을 소개한다. 오랫동안 무대를 떠났던 황 씨에게 이날 지리산 무대는 비공식 복귀 무대인 셈이다. 밖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노랫소리를 들으며 배건웅 셰프와 송보라 셰프는 그들이 칼과 그릇으로 하는 예술, 요리를 한다. 배 셰프는 “모든 예술은 기술을 바탕으로 한다. 요리 또한 기술을 바탕으로 한 예술이다”라며 요리가 왜 예술인지 설명한다.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던 날 나는 ‘지리산 청년 예술가 기행’을 진행했다. 청년 예술가들을 위한 여행을 만들어 ‘여행을 통한 예술 복지’를 구현하자는 취지로 〈시사IN〉에 제안해 이뤄진 여행으로 지리산 둘레길 운영기관인 사단법인 숲길에서 트레킹 일정을 도왔다.      


청년은 시간이 없고, 예술가들은 돈이 없다고 하는데, 여행은 돈과 시간이 모두 필요하다. 청년 예술가를 위한 여행을 꾸려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이전에 청년들과 함께한 여행이 좋은 기억을 남겼기 때문이다. 2015년 강제윤 섬연구소 소장과 함께 진행한 ‘청년 섬 캠프(연홍도·애도·사양도·장도·만대도· 연지도)’, 2016년 강기태 여행대학 총장과 함께 기획한 ‘섬 청년 탐사대(관매도· 문갑도)’, 2017년 이한호 여행주간 디렉터와 함께 만든 ‘원산도 청년 탐험대’, 2018년 김민수(아볼타) 고섬 대표와 함께 다녀온 ‘연홍도 예술섬 원정대’에서 청년들이 여행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직접 느꼈다.     


섬 여행은 청년들에게 즐거운 ‘유배’를 선물했다. 잠시나마 취업과 생계 걱정을 잊게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섬에 데려가면 그들은 주문처럼 같은 말을 되뇐다. “정말 편안하다. 여기서는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든다.” 기성세대라면 육지에 비해 저개발 된 섬에서 결핍을 느꼈을 텐데 그들은 오히려 무위의 공간인 섬을 즐겼다.   


    

육지의 섬인 산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기대하며 지리산 청년 예술가 기행을 기획했다. 예술가들을 위한 여행인 만큼 ‘예술적으로’ 만들기 위해 지리산 프로젝트 기획자 중 한 명인 최윤정 큐레이터를 ‘아트디렉터’로 섭외했다. 그녀는 2014년 ‘지리산 프로젝트: 우주예술집’과 2015년 ‘지리산 프로젝트: 우주산책’에 참여했고 2016년과 2017년에는 한센인 요양 시설인 경남 산청 성심원의 역사관 조성하는 일을 맡았다.     


최윤정 아트디렉터에게 여행에서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할 필요는 없다고 주문했다. 지리산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이 영감을 받은 계곡, 그들이 바람소리를 들으며 휴식을 취한 나무 그늘, 그리고 멍하니 석양을 바라보던 언덕에 데려다주면 된다고 부탁했다. 청년 예술가들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하고 있으니 뭔가를 ‘안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참여한 청년 예술가들에게도 이번 여행이 끝난 뒤 별다른 ‘활동’을 요청하지 않았다. ‘블로그에 후기를 올려달라’ 거나 ‘SNS에 해시태그를 걸어달라’ 따위의 요구를 하지 않은 것이다. 이번 감성여행이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면 그들의 작품 속에 저절로 스며들어갈 것인데, 굳이 뭘 따로 요구할 이유가 없었다. 지리산이 주는 영감은 오직 그들의 작품 속에 표현될 것이다.     


청년 예술가들이 내려온다고 하니, 고맙게도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이 반갑게 맞았다. 남원 국립민속국악원 지기학 예술감독은 광한루에서 ‘긴 사랑가’를, 해설까지 곁들여 들려주며 일행을 맞았다. 이상윤 이사는 지리산 둘레길 중군마을-장항마을 구간을 함께 걸으며 둘레길의 생명 평화 정신을 들려주었다. 숙소인 ‘지리산 길섶’의 주인인 지리산 사진작가 강병규 씨는 술과 음식으로 여행의 피로를 달래주었다. 이튿날은 윤용병 인드라망공동체 한생명 운영위원장과 이한호 양림쌀롱 여행자라운지 대표가 실상사와 광주 양림동의 안내를 맡아주었다.     


흔히 여행은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청년 예술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바로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지역은 그들의 눈을 빌려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한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그들의 감성적인 눈이 지역을 재발견해내고, 사람의 마음을 붙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음을 줄 수 있다. 요즘 지방자치단체들이 관광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블로거 초청 행사도 열고 여행 작가와 기자들도 부르는데, 이런 청년 예술가들도 초대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서로에게 좋은 ‘발견’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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