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닌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것의 위대함
화면 속 피나 바우쉬는 “Dance, Dance, Otherwise we are lost”라고 말했고, 자막은 이 말을 ‘나는 춤춘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번역했다. 무용가 겸 안무가 피나 바우쉬를 다룬 다큐멘터리 <피나>는 예술가에 대한 추모가 어떠해야 하는지 전범이 될 듯하다. 1999년 다큐멘터리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모든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애잔함을 감각적으로 담아냈던 빔 밴더스 감독은 3D <피나>를 통해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서 더욱 감각적인 추모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피나>는 ‘피나 바우쉬는 무용의 천재다’라는 것을 말하지 않고 증명했으며, 예술가를 추모하는 방식은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했다. 예술적 추모만이 예술가를 부활하게 한다. 빔 밴더스 감독은 “처음 피나의 무대를 보았을 때 나는 믿기지 않는 아름다움에 압도되었다. 나는 그 마법을 스크린에 옮겨놓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예술가를 추모하는 방식은 예술적이어야 한다? 이 물음에 우리는 얼마나 자신 있게 ‘우리도 그랬다’라고 답할 수 있을까?
생전에 피나 바우쉬는 자신의 안무에 대해 “나는 인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보다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는 가에 더 흥미를 느낀다.”라고 설명했다. 다큐는 이 질문에 충실하게 답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빔 밴더스 감독은 부퍼탈 탄츠테아터, 1973년부터 피나 바우쉬가 이끌어온 독일 무용단의 무용수들을 인터뷰해 그들의 움직임이 어디서 왔는지를 규명했다. 피나 바우쉬에 대해 직접 묻지 않고 개별 무용수를 조명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집합체인 피나 바우쉬를 설명한 것이다.
돋보이는 것은 무용수들의 인터뷰 때 그들의 말을 따로 더빙해서 들려주고 화면에는 침묵하는 그들의 표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덕분에 무용수들의 미세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침묵 아닌 침묵이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입과 싱크 되지 않는 말은 말대로 귀에 들어오고 그들의 덤덤한 표정은 표정대로 눈에 들어왔다. 개별 무용수를 존중했던 피나 바우쉬처럼 빔 밴더스 감독도 그들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진정성을 이끌어냈다.
다큐 <피나>는 3D라는 기술의 존재 의미를 보여주었다. 실제 피나 바우쉬의 공연을 맨 앞자리에 앉아서 보는 듯한 실재감을 주었다. <마주르카 포고> <러프컷>과 함께 최고의 피나 바우쉬 공연으로 이 <피나>를 자신 있게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과학과 영화와 무용이 환상 결합하는 이 장면에서 잠시 통섭이 죄가 되었던 우리의 현실을 떠올렸다. 예술에서의 통섭과 융합이 ‘좌파’라는 이름으로 처벌받았던 시절,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아름다운 원칙은 사라지고 ‘지원은 못해도 간섭은 한다’는 폭거가 행해졌던 시절……
<피나>를 보고 피나 바우쉬를 혹은 부퍼탈 무용단을 이해하기보다는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까이 당겨 찍은 화면을 보면서 무용은 등으로, 턱으로, 손끝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용 언어의 알파벳이라 할 수 있는 몸짓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용수의 움직임을 읽어내려고 애쓰기보다 무용수는 왜 저런 움직임을 할까, 하는 것으로 질문이 옮겨졌다.
잘못 만들어진 무용은 가장 난해한 언어가 되지만 잘 만들어진 무용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언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피나>를 통해 무용 언어의 기초부터 응용까지 두루 경험할 수 있었다. 무용단원들이 길게 늘어서서 반복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표현처럼 기초적인 무용 언어부터 절정의 순간 격정적인 표현까지 모두 눈에 들어왔다. 무용수들 한 명, 한 명의 벽돌을 보니 부퍼탈 무용단이라는 집이 보였다.
가장 힘을 준 자세가 가장 편안해 보이고, 가장 편안한 자세가 불편해 보이는 것, 그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무용이다. 작품으로 볼 때 피나 바우쉬는 가장 일상적인 포즈를 무용에 끌고 온 것으로만 보였다. 그런데 그 동작을 재현하는 데 있어서 무용적 표현으로 바꾸기 위해서 얼마나 품을 들였는지 창작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파악할 수 있었다. 쉬운 길도 돌아가는 신중함이 오히려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내는 답이 되기도 했다.
안무가의 역할은 자신의 구상을 무용수들을 통해 구현하는 일이 아닌, 무용수들의 느낌과 감성을 모아서 잘 배치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같은 역할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전체’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부분’에 충실한 일이 ‘전체’를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것을 피나 바우쉬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 확신을 바탕으로 그녀의 ‘열정’은 ‘여유’로 표현되었다. 이것이 무용을 하거나 무용을 관람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창작활동을 하거나 창작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피나>를 봐야 하는 이유다.
통일성 규칙성 등을 바탕으로 무용수의 기술을 다투는 것이 고전무용이라면 그 기량을 가지고 감정을 표현해내는 역량을 다투는 것이 현대무용이다. 고전무용은 수식어가 하나라면 현대무용은 여럿이다. 그래서 때로 추상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피나 바우쉬는 물 흙 바위 나무 등 기초적인 자연물을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기본적인 표현에 충실했다. 그 원초적인 움직임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었다.
이런 추모를 보고 싶다. 진정 그 예술가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추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