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엔 두 종류가 있다. 건더기 맛이 좋은 여행지와 국물 맛이 좋은 여행지. 건더기 맛이 좋은 여행지는 시그니쳐 포인트가 많은 곳이다. 그래서 그 도시에서 가봐야 할 곳이 명확하다.파리나 밀라노 피렌체 바르셀로나 등 유명 여행지는 대부분 이렇게 건더기가 많은 곳이다.
반면 시그니쳐 포인트는 없지만 도시의 느낌이 좋은 곳들이 있다. 도시가 빚어내는 서사와 사람 사는 풍경이 좋아서 여행감을 높여주는 곳! 쿠바나 남프랑스 그리고 지중해 섬들이 그런 곳이다. 대체로 이런 곳은 머무르기 좋은 곳들이다.
발트 3국은 국물 맛이 좋은 여행지다. 뚜렷하게 여기가 좋다, 이걸 봐야 한다, 하는 곳이 많지 않다. 성당이든 성이든, 다른 유럽 도시에 비하면 여기가 훨씬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이 도시에서 꼭 가봐야 할 곳’ 등등의 정보를 따라 돌아다니면 실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곳들을 연결하는 나만의 선을 그리면서 조용히 걷기엔 정말 좋은 곳이다.
발트 3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역사의 황금기가 적었다. 흔히 유럽 문명을 기독교 문명 & 로마 문명이라고 하는데, 일단 기독교의 포교가 가장 늦었고 로마는 여기까지 뻗치지 못했다. 서기 천년까지, 이들의 조상은 후손들에게 남긴 게 거의 없었다(목조 문화였던 우리와 마찬가지로).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이 날개 기병대로 발호할 때 잠시 제국을 경험했지만 그 뒤로 쭉 강대국들에게 짓밟혔다. 과거의 풍요가 역사문화유산의 바탕인데, 확실히 아래 라틴국가(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에 미치지 못한다. 라틴국가의 성당에서 확인하는 신에 대한 정성에, 이곳은 한참 못 미친다.
하지만 발트 3국은 구도심 산책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산책하는 맛이 난다. 특히 빌니우스는 관광객이 적어 현지인들이 보여주는 삶의 풍경 속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해안도시인 탈린이나 리가에 비해 빌니우스는 관광적 요소가 떨어지는 편이다). 그들의 삶 속에 바로 들어가서 곁불을 쬘 수 있다. 금새 친근해진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제국의 양대 수도였던 빌니우스는 리가나 탈린에 비해 구도심이 큰 편이다. 하지만 프라하나 부다페스트처럼 과거의 영광으로 꽉 차 있지 않다. 과거와 현재, 고급과 비루함, 바쁨과 한가함이 마구 혼재되어 있다. 도심이 좀 산만하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풍경’을 보여줘서 심심하지 않다. 도심을 산책하면 별거 없었는데 상당히 다채롭다는 느낌을 받는다. 국물맛이 좋은 여행지다. 뭔가 개운한 느낌.
이런 빌니우스에서 가장 뒤지는 것 중의 하나가 쇼핑가다. 유럽 다른 도시에 비해 명품 쇼핑가가 상대적으로 발달해 있지 않다. 브랜드도 적고 매장도 작고 그리 화려하지도 않다. 그런 빌니우스에서 명품 쇼핑에 몰두했다는 그녀의 집중력이 놀랍다. 건더기가 가장 없는 곳에서 용케 건더기를 건져갔다.
아직 서유럽만큼은 아닌지만 발트 3국은 구소련에서 독립한 국가 중 가장 잘 사는 나라로 꼽힌다.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5천~3만 정도. 같은 구소련 출신 독립국가인 코카서스 3국이 1만 불에 못 미치는 것과 대비된다. 이들의 문화적 저력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은 돈을 쓰면 돈을 쓴 티가 팍팍 난다는 것이다(그렇지 못한 나라들도 많다).
무엇보다 국민소득이 어느 정도 되어서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 매력이다. 어디든 관광객이 즐기는 도시보다 그 나라 사람들이 즐기는 도시가 훨씬 매력적이다. 빌니우스가 그렇다. 삶의 여유를 만끽하는 리투아니아인들을 볼 수 있다. 어디든 폰카를 들이대면 에드워드 호퍼 그림 속 풍경이 펼쳐진다.
빌니우스 산책은 도심산책보다 도심을 둘러싼 공원을 산책하는 것이 좋다. 외침이 많았던 빌니우스는 토성 같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구도심 양쪽에 전망대와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마치 공주 공산성과 부여 부소산성이 한 도시에 있는 느낌이다. 언덕의 커브를 따라 바람을 맞으며 걸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아무 검색 없이 마냥 걸어도 된다. 어느 광장에선가 아름다운 선율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어느 골목에서든 매력적인 카페가 당신에게 손짓할 것이다. 계획하지 않으면 계획된 것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발트 3국의 여름 기후도 매력적이다. 덥지도 춥지도, 바람도 습도도, 모든 것이 적당하다. 어제는 낮기온이 27도 정도로 볕이 좀 뜨거운 편이었는데 일행에게 “우리가 가는 곳 중 가장 더운 곳의 가장 더운 날이니 이 더위를 즐기시라”라고 말했다. ‘발틱 베이케이션’의 묘미다.
발트 3국 여행 때는 ‘발틱 시에스타’를 권한다. 백야를 즐기기 위해서는 초저녁에 한숨 자두는 것이 좋다. 6시~8시 정도. 저녁을 먹을 시간 정도에 한 숨 자두고 나와서 석양(10시 정도)도 즐기고 도시의 야경도 즐기면 좋다. 백야에는 12시가 넘어서도 북적이는 바나 카페가 많다.
주) 바쁜 현대 도시인을 위한 여행클럽, ‘어른의 여행, 트래블러스랩’을 구축하고 있는 고재열 여행감독입니다. 제가 기획하는 여행이 궁금하신 분들은 트래블러스랩의 네이버카페를 들어가 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