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임금은 최고의 미식가였다.
“재료 본연의 맛을 잘 살렸다.”
“건강해지는 맛이다.”
“요리사의 정성이 느껴진다.”
음식평론가들이 할 말이 별로 없을 때 혹은 맛이 없을 때 하는 말 세 가지다. 음식평론가들이 음식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평론가의 절대미각? 아니면 요리 자체의 완성도? 그중에서도 한식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평가라는 것은 주관적이어서는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한데 무엇이 그런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조선 시대 궁중 음식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리 궁중 음식은 실용성을 으뜸으로 삼았다. 음식에 사람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음식을 맞추는 것이 기본 철학이었다. 2003년 <대장금>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우리 궁중음식이 각광받았는데 그때 우리 음식의 철학에 대해 취재한 적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38호인 조선 왕조 궁중 음식은 정조대왕이 수원 행궁에 거둥 하는 과정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 같은 문헌 자료와 한말 마지막 수라간 상궁이었던 한희순 상궁의 구전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다. 우리 음식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궁중 음식에는 우리 선조의 음식에 관한 철학이 집대성되어있다.
요즘 사람들이 수라상을 받아보면 두 번 실망할 것이다. 먼저 임금의 밥상치고 생각만큼 화려하지 않아서일 것이고, 또 (요즘 기준으로 하면) 생각보다 맛이 없는 점에 실망할 것이다. 임금의 밥상이 왜 그렇게 초라하고 맛이 없는 것일까?
수라상이 화려하지 않은 것은 실용성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수라상 상차림은 모양새보다 먹기 편한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음식에 대한 조선 왕조의 철학이 오직 겸손하게 양생하고 공양하는 것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상차림의 관건은 ‘어떻게 하면 음식이 예쁘게 보일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밥을 잘 먹을 수 있게 하느냐’였다.
수라상은 상을 받는 사람을 극진히 우대하고 대접한다는 의미에서 독상을 썼는데, 상의 크기는 한 사람의 팔이 닿을 수 있는 범위를 넘지 않았다. 그릇도 모양보다 기능을 중시해서 종지를 주로 썼다. 겨울철에는 유기나 은기를 쓰고 여름철에는 사기를 주로 썼는데, 뚜껑을 닫아 음식의 변질을 막았다.
그릇을 놓을 때는 먹기 편한 것에 비중을 두었다. 음식을 찍어 먹는 장은 밥 바로 앞에 놓아서 먹기 편하게 했고, 더운 음식과 신선한 음식 역시 앞에 놓아 먼저 먹을 수 있게 했다. 젓가락이 자주 가는 오른쪽에는 영양이 많은 권장 음식을 놓았고, 그렇지 못한 왼쪽에는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밑반찬을 놓았다.
음식을 할 때는 소화가 잘 되도록 신경을 썼다. 다소 모양이 떨어지고 맛이 반감되더라도 다지거나 갈아서 무르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음식의 크기도 한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작게 만들었다. 수라상에 오르는 음식은 격무에 시달리는 왕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고영양 식이 많았다.
수라상은 아침과 저녁에 두 번 내었는데 새벽 죽상이나 낮참·야참을 수시로 내어 조금씩 자주 먹을 수 있게 했다. 수라상은 12첩 반상으로 차려졌는데, 특별히 만든 음식은 세 가지를 넘지 않도록 했다. 음식의 가짓수를 많이 한 것은, 각 지방에서 진상한 재료들로 만든 음식을 임금이 두루 먹어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은 진상한 음식을 먹으면서 밥상에서 백성의 생활상을 살폈다.
점심은 주로 면을 먹었다. 주된 점심 메뉴였던 장국수는 궁중 음식에 담긴 실용주의의 백미를 보여준다. 국수를 장국에 말아서 바로 먹을 수 있도록 고안된 장국수는 일종의 궁중 패스트푸드였다. 오찬으로 신하들과 장국수를 함께 먹음으로써 임금은 수라상을 받기 위해 침전에 다녀오는 수고를 줄이고 신하들과 여담도 즐길 수 있었다.
궁중 음식의 재료에는 철저하게 ‘신토불이’ 원칙이 고수되었다. 각 지방에서 진상한 재료 외에 수입 재료로 만든 음식은 거의 없었다. 또한 절기에 맞는 재료로 음식을 조리했는데, 이는 시절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방에서 진상한 재료가 올라오면 먼저 조상에게 천신(제사)을 하고 이를 조리했다.
양념은 자극적인 것을 피했다. 양념은 재료의 본래 맛을 살리는 데 무게를 두었다. 표고버섯이나 잣소금을 이용해서는 감칠맛을 더했다. 파와 마늘 같은 향신료는 절제했다. 간이 세지 않기 때문에 화학조미료에 ‘오염’된 혀로는 궁중 음식의 참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양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간장이었다. 콩장 문화권에 속한 조선에서는 간장이 가장 기초적인 양념이었다. 궁중의 장독대는 장고(醬庫)라고 불렸는데, 담을 두르고 빗장을 쳐서 지키도록 했다. 장고에는 햇장부터 수십 년 묵은 장까지 보존되어 있었다. 수랏 상궁들은 이 장을 묵은 정도에 따라 중장·청장·진장이라고 달리 부르며 음식에 따라 특성에 맞는 간장을 넣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 왕조는 왕의 수라상을 차릴 때 음양과 오행이 맞도록 차렸다. 모든 것을 쌍으로 두어 밥과 국을 한 벌로 쳤는데, 밥은 밥대로 흰밥과 오곡밥이 한 쌍이 되게 했고, 국은 국대로 미역국과 된장국이 한 쌍이 되도록 했다. 또한 주식으로는 영양을 섭취하고 부식으로는 맛을 내게 하는 등 음식과 고명이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게 했다.
재료와 고명을 사용하는 데나 맛을 내는 데에는 오행을 구현했다. 오방색(흰색 검은색 녹색 붉은색 노란색) 재료를 따로 써서 모아 담아 구절판과 신선로를 만들기도 하고, 이를 섞어 잡채나 탕평채를 만들었다. 맛을 낼 때는 절제의 미덕이 중요시되었는데, 한 상에 단맛·신맛·매운맛·짠맛·쓴맛이 골고루 어우러지게 했다.
음양오행설을 비롯한 음식의 철학은 일상식보다 잔칫상에서 극대화했다. 궁중 연회 음식 전문가인 한국전통음식연구원 한영용 원장은 “잔치 음식에는 의미가 없는 것이 없었다. 음식마다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음식을 놓는 숫자도 철저하게 길 수를 지켰다. 심지어 음식상을 장식하는 꽃까지도 의미를 지녔다”라고 설명했다.
일상식을 여자 상궁이 만드는 대신 잔칫상은 남자 숙수(조리사)들이 만들도록 했다. ‘궁중에서 하명을 기다리는 솜씨가 좋은 손’이라는 의미에서 ‘대령숙수’로 불렸던 이들은 궁중의 진연(왕실의 경사)과 찬연(나라의 경사) 잔칫상을 맡았다.
잔치 음식이 화려해 보이는 것은 음식을 높이 쌓는 ‘고임’ 때문인데, 이것 역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임’은 잔치 주인공의 덕에 ‘바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의미가 크고 경사가 겹칠수록 고임이 높아졌지만, 그 또한 규정에 따라 제한이 있었다. 고임은 또한 잔치 참가자에게 ‘베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나누어 먹기 편하고 가져가기 수월한 과자나 떡 등으로 고임을 만들어 잔치가 끝난 다음 고루 분배했다.
궁중 잔치는 엄격한 규정에 의해서 열렸다. 왕이 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통 왕실과 나라에 경사가 생기면 신하들이 잔치를 제안한다. 왕은 여러 번 거절하다가 신하들의 청이 계속되면 비로소 허락했다. 잔치를 열기로 결정되면 주관 기관인 ‘진연도감’이 설치되어 철저한 계획을 세워 잔치를 치렀다.
조선 시대에는 ‘요리’라는 말이 없었다.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의미의 ‘음식’이 모든 것을 통칭했다. 사람이 요리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음식을 맞추는 것이 기본 철학이었기 때문에, 물 한 그릇을 놓더라도 마실 사람의 몸 상태에 맞는 것을 떠 오는 것을 기본 도리로 여겼다.
상차림보다는 음식 그 자체, 음식에서도 모양이나 맛보다 기능을 중시한 궁중 음식은 ‘약식동원(藥食同源)’ 문화, 즉 ‘먹는 음식이 곧 약이 된다’는 사고의 결정체이다. 궁중 음식은 왕을 위한 맞춤형 음식이었다. 왕의 건강을 위해 내의원 어의와 수라간 상궁은 긴밀한 협조 체제를 구축하고 음식을 만들었다.
궁중 음식은 최고의 음식전문가에 의해 조리되었다. 수라간 상궁은 보통 20년 경력을 가져야 왕의 밥상에 오르는 음식을 조리할 수 있었다. 요즘 호텔 총주방장들의 경력이 20년 남짓이라는 것과 비교하면 그 전문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신라호텔 서상호 총주방장은 "재료가 각자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서로의 고유한 특성을 죽이는 요즘의 퓨전 요리는 쉽게 질린다”라고 말했다. 그는 퓨전 요리를 만드는 주방장들이 궁중 음식이 가진 5백 년 노하우를 익힐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궁중음식연구원 한복려 원장은 “최고의 음식 전문가인 수랏 상궁들이 5백 년 동안 쌓은 음식 문화의 결정체가 바로 조선 왕조 궁중 음식이다. 이를 먼저 익히고 외국의 음식을 받아들여야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요리라는 말부터 음식으로 바꾸는 것이 그 시작이라고 지적했다.
다시 맨 처음 이야기로 돌아와서 한식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궁중음식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면 먹는 사람에게 최적화된 음식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대장금> 첫 부분에 어린 장금이가 한상궁의 물 심부름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정안수도 떠오고 온갖 좋다는 물을 떠 오는데 한상궁이 물을 받아 마시지 않는다. 그러다 장금이가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몸은 어떠십니까?”라고 물은 뒤에 물을 떠 오자 드디어 받아 마신다. 즉 최고의 물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상태에 맞는 물이 최고의 물이라는 것이다. 한식을 평가할 때는 다양한 앵글이 필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냥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했는데 왜 홍시라고 생각했냐고 하시면...” 하는 장금이의 홍시 에피소드도 최고상궁의 다음 말로 갈무리된다.
“홍시는 요즘 같은 환절기에 고뿔 예방에도 좋고 숙취에 그만인데, 어제 전하께서 술을 드셨길래 좀 넣었는데, 저 아이가 맞췄구나. 음식이란 것은 만드는 사람의 솜씨에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맛을 보는 데는 차이가 없다.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맛이야. 그러니 앞으로는 음식에 대해서는 모두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서로 자극을 주고 발전을 하도록 하여라.”
결론은? 네 혀를 믿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