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생일>에서 뼛속까지 연기한 전도연과 설경구
<생일>은 왜곡이 심한 영화다. 유가족 주변 인물들이 사람의 온도를 전하며 위로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영화에서처럼 세월호 유가족에게 따뜻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유가족에게 조건 없는 위로를 보낸 시간은 고작 한 달 남짓이었다.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아 유가족이 아닌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주겠다는 지방선거 후보가 나타났다.
보상금을 기웃거리는 작은아버지, 아이를 잃은 엄마의 통곡을 참지 못하는 옆집 딸, 영화에서는 고등어를 발라먹을 때 어쩌다 나오는 잔가시처럼, 유가족을 괴롭히고 혐오하는 주변 인물들이 간간이 나온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유가족에 ‘~~충’을 붙여가면서까지 가혹하게 조롱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슬픔의 사회적 종결’을 모두가 암묵적으로 바랬다. 원폭 피해자를 다룬 일본 만화 <저녁뜸의 거리>에서 피해자 가족이 “사람들은 우리가 그냥 조용히 사라져 버리길 바라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우리의 시선도 그랬다. 아무런 공감도 없이 ‘할 만큼 했다’며 간주하는 사람이 많았다.
안전을 방치해 참사를 야기하고, 무능으로 구조에 실패하고, 부도덕으로 진상조사를 막고, 파렴치로 유가족을 공격하면서 우리 사회는 유가족에게 ‘피해자 다움’을 주문했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그러하듯이. 희생자 유가족들이 나와서 “폐를 끼쳐서 죄송하다”라고 송구스러워하는 일본을 닮으라고 했다.
그런 개와 늑대의 시간에 유가족들이 어떻게 서로를 의지하면서 버텼는지를 <생일>은 보여준다. 물론 그 안에서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한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정부의 보상금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그런 모습을 두둔하기도 하고 때론 비난하기도 한다. 사람이 사는 모습이 그렇듯 피해자 집단도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생일>의 개봉에 즈음해 이제 슬픔에 대해서 말해도 되는 것인지, 이 사건을 영화화해도 괜찮은 것인지 잔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슬픔의 사회적 종결’ 선언에 목말라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였다. 이 사건을 영화화해도 되는 것인지를 물을 때가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라도 이 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아닐까.
타인의 슬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일까? 어쩌면 이 영화를 연출하고 제작하기로 한 감독과 제작자는 용감을 넘어 무모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 용기를 증명하는 것은 진정성이고 그 진정성을 관객에게 구현해 내는 사람은 배우다. 전도연과 설경구는 그 어려운 과업을 해냈다. 연기 또한 추도의 한 방식이었다.
슬픔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생일>만큼 진지하고 집요하게 파고든 영화가 또 있었을까 싶다. 전도연과 설경구는 가혹할 정도로 감정의 심연을 파고들어 응축된 슬픔을 끄집어낸다. 이 작은 영화를 위해 그들이 가진 재능을 끝까지 짜내려 한 두 배우에게 경의를 표한다. 덕분에 덤덤하게 희생자를 추도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