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세계에서 깨어나다

40대, 늦게 찾은 나의 별천지 세상

by 그로우루샤

40대, 늦게 찾은 나의 세계

40대 중반을 살아가는 지금, 문득 깨닫는다. 나는 참으로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불과 4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작은 세계에 갇혀 좁디좁은 마음과 시야로 살아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익숙한 안전지대가 편하고 안정적이라 여겼을 뿐, 그것이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불편한 부분은 있었다. 특히 사람들과의 소통이 어려웠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모르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에 움츠러들곤 했다. 경험 부족에 대한 자각만이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눌렀다.


1. 갇힌 어린 시절, 형성된 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면, 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의 5남매 중 셋째로 자랐다. 부모님은 생계를 위해 늘 바쁘셨고, 다섯 자녀를 제대로 돌보기 어려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를 집에 가둬놓고 돈벌이에 나서셨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첫째 동생이 여섯 살 무렵의 일이 아직도 선명하다. 우리 오 남매를 데리고 인천 해수욕장에 가던 길, 지하철 안에서 말괄량이 동생이 부모님 손을 벗어나 옆 칸으로 뛰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정차역에서 모두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동생만 내리지 못한 것이다.


엄마는 넷째가 보이지 않자 당황하며 문이 닫히기 전까지 붐비는 열차 안을 뛰어다니며 동생을 찾았다. 결국 열차 밖으로 나왔을 때, 문이 닫히고 창문 너머로 울면서 엄마를 찾는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엄마는 뱀처럼 기다란 열차를 두들기며 움직이는 열차가 서기를 바라며 고성과 함께 운전사를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2-3분 만에 결국 열차 안 시민의 전달로 열차가 멈췄고, 문이 열리자 울던 동생은 엄마 품에 안겼다.


그때의 기억이 상처가 되어, 그 이후 우리 형제들은 어린이날이나 명절에도 절대 놀이공원이나 먼 곳은 가지 않게 되었다. 엄마는 항상 우리에게 집에서 놀라고 강하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경험을 해보지 못한 채 자랐다.


엄마는 언제나 먹고사는 일에만 열중하셨고, 아버지는 성당에서 피아노 봉사와 성가대 지휘자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셨다. 그런 부모님의 모습만 바라보며 자란 나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신앙교육을 받으며 고지식하게 살아왔다. 항상 신앙교육 안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했으며, 그것이 정답이라 믿었다. 지금 돌아보면 융통성이 없는 사람으로 자랄 수밖에 없던 환경이었던 것 같다.


2. 결혼 후 마주한 다른 세계


시간이 흘러 결혼을 했다. 다양한 것에 관심이 많은 남편과 고지식한 나의 사고는 항상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없이 자란 나에게 엄마의 자린고비 성향이 고스란히 전해졌던 탓일까. 나는 언제나 돈에 전전긍긍했다. 돈을 제대로 쓸 줄 몰랐고, 돈을 쓰더라도 가치를 하지 못하면 매우 화가 났다. 손해를 절대 보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했다. 물건을 살 때도 가격 흥정하는 것이 당연했다. 엄마와 시장에 가면 엄마도 늘 백 원, 이백 원을 깎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고, 물건이 조금이라도 저렴하다면 집에서 거리가 멀어도 끌 게를 끌고 힘들게 사러 다녔다. 나와 엄마는 똑같았다. 애석하게도, 나는 엄마의 모습을 빼닮았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나의 모습이 혐오스러워졌다.


한 번은 시댁에서 시어머니와 장을 보러 갔는데, 평소 하던 대로 물건 값을 깎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시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얘, 시장에서 고생하는 분들에게 그 몇 푼이나 된다고 값을 깎으려 하니?" 평소 넉넉하게 살아오신 시어머니는 나의 가격 흥정이 썩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또 한 번은 시댁에서 과일을 깎고 남은 껍질을 먹으려는데, 시어머니가 말리셨다. "얘, 제대로 된 과일을 먹지, 그거 버려라. 뭐 먹을 게 있다고 그러니?" 그 순간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친정에서는 당연히 과일 껍질까지 끝까지 씹어 먹는데, 시댁은 마치 다른 세계 같았다. 어느 순간 친정과 시댁의 경제적 수준 차이에 대한 불편함이 자격지심처럼 밀려왔다.


그리고 어느 날,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어떤 주제로 이야기하던 중, 그 사람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세상물정 너무 모르고 살고 계셨네요." 그 사람은 나와 비슷한 나이대였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나는 뭘 하고 살았나'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 감정은 시간이 흘러 잊혔다.


3. 책 육아의 덫에 갇히다


연년생 두 아들을 키우며, 나는 또다시 나만의 좁은 세계를 두 아이들에게까지 강요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아이 모두 마음의 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어릴 때 부모님께 관심을 크게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공부에 대한 욕심이 강했다. 특히 독서를 많이 하지 못했던 과거가 아쉬워, 두 아이에게는 태어나자마자 엄청난 양의 책을 사들였다. 그리고 돈값을 하기 위해 그 많은 책을 두 아이 모두 옆에 앉혀놓고 토할 정도로 읽어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수시로 책을 읽어주는 엄마 덕분에 말도 빨리 했고, 언어 능력이 또래에 비해 월등히 좋았다. 주변 사람들은 돌도 안 된 큰아이의 문장력에 감탄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책 육아를 시키겠다며 미친 듯이 책을 읽어주었다.


그런 세월이 7년간 계속되자, 결국 나는 폐인이 되어갔다. 어느 순간 나는 아이들을 키우는 로봇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토록 열심히 키웠다고 자신했는데, 아이들은 둘 다 손톱, 발톱을 뜯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는 내내 우울감이 찾아왔다. 나 자신에 대한 돌봄 없이 두 아이들만 바라보고 시간을 보냈건만, 돌아오는 것은 아이들의 심리적 문제뿐이었다.


4. 자기 계발, 새로운 나를 찾다


그즈음 나는 내 안에서 새로운 나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껏 해보지 않은 경험들, 지식을 쌓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들던 중 '자기 계발'이라는 키워드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자기 계발 서적을 읽고, 관련 영상을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 돈 공부도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시간 부자, 돈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었다.


낮았던 자존감이 점점 회복되기 시작했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올라왔다. 그전까지는 누군가의 도움이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의존했었다. 어릴 때는 엄마, 결혼해서는 남편. 언제나 내가 아닌 상대에게 무언가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잦았다.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5. 고시원 사업, 첫 번째 도전


자존감이 회복되면서 부자가 되기 위한 여러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공부를 하면서 사업을 해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사업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기술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사업 중 하나로 고시원 사업이 눈에 들어왔다.


예비비도 없이 무작정 대출을 일으키고 가족에게 돈을 빌려 고시원을 계약했다. 단 한 달의 온라인 강의와 유튜브 영상만 보고 무작정 계약하다 보니, 계약 후 여러 어려움에 봉착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업이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계약하고 6개월 만에 첫 번째 고시원을 접어야 했다.


이제 그만하겠다고 다짐하던 차에, 중개인이 아주 좋은 값에 새로운 고시원을 소개하겠다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싼값에 나온 매물이라 하고 싶은 마음과 첫 번째 고시원에서 겪은 힘든 과정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두 가지가 교차했다. 결국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이 커서 두 번째 고시원도 인수해 운영하게 되었다.


첫 번째 고시원 규모의 두 배 크기라 운영이 더 힘들었다. 사람들의 민원도 더욱 해결하기 어려웠다. 소송 전문가라는 세입자에게 시달리기도 했고, 노숙자 신분으로 들어온 세입자와 여러 갈등을 빚으며 가슴앓이를 했다. 결국 두 번째 고시원도 5개월 만에 넘겨야 했다.


그렇게 나는 고시원 사업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경험을 통해 한층 성장한 느낌이었다. 경험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깊은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세상을 더 크게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6. 배달 음식점, 불가능에 도전하다


다양한 온라인 공부를 하면서 퍼스널 브랜딩과 SNS 마케팅에 대해 알게 되었고, 새로운 사업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공부하면서 알게 된 대표님을 통해 원데이 클래스를 접했고, 그 수업에서 배달 음식점 사업을 알게 되었다. 직접 운영하지 않고 사람을 고용해 월 몇천만 원씩 번다는 대표의 말을 듣고, 나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결국 수업을 들은 지 두 달 만에 배달 음식점을 개업하게 되었다. 음식 만드는 것 자체에 관심도 없고, 집에서 주방일조차 버거워하던 내가 배달 음식점을 차릴 줄이야. 주변에서는 나의 결정에 혀를 내둘렀다. 일을 해본 적 없는 나를 잘 아는 가족들, 특히 친정 엄마는 극구 말렸다. "네가 밥도 잘 안 해 먹는데 무슨 음식점이냐?"라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런데도 나는 자기 계발을 통해 '난 하면 되는 사람이야'라는 마음으로 무작정 일을 시작했다. 사실 돌아보면 엄마 말을 들었다면 이런 '개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무모한 결정이었다. 육회, 연어, 사시미도 먹을 줄 모르는 내가 육회연어사시미를 파는 배달 음식점 점주가 되었으니, 누가 봐도 어이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나는 해냈다. 그리고 지금도 가게를 운영해 나가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새벽까지 일해야 했던 그 2년의 시간을 떠올리면, 다시는 이렇게 무모한 짓은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올라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시야가 넓어졌다는 생각도 든다. 요식업은 상상도 못 했는데, 지금은 요식업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생긴 것 같다. 경험을 통해서 말이다.


처음 육회, 연어, 사시미 배달 음식점으로 시작했지만, 개업 후 몇 개월부터 매출이 급감했다. 고생하는 것에 비해 매출이 적으니 동기부여가 잘되지 않았다. 어차피 똑같이 고생하는 거라면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샵인샵을 고려하게 되었다. 한 가게에 다른 업종의 음식을 판매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걱정도 많았지만, 결국 두 번째 시도 끝에 지금은 타코야끼, 닭강정 브랜드를 겸해서 운영하고 있다.


처음 배달 음식점을 시작한 이유는 직접 운영하지 않고 사람을 고용해 시스템을 돌리겠다는 것이었지만, 그 목표는 쉽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오래 일할 수 있고 마음 맞는 사람을 뽑는 것이 어려웠다. 오랜 기간 한 곳에서 마음 맞춰 일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두 달 일하고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좋은 사람 찾기 어려우니 결국 주인인 내가 일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일하기 벅차니 직장 다니는 남편에게 SOS를 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온 남편은 나를 도와야 했고, 남편의 피로가 누적되면서 부부 관계가 좋을 리 없었다. 잦은 다툼과 피로는 아이들에게 분노로 전달되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더 이상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2년간의 운영으로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다. 남편에게 수시로 '때려치우고 싶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문제는 상가가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동산 이곳저곳에 내놓고 나가기를 바랐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타코야끼, 닭강정은 단순 조리라 외국인을 고용해 운영하고자 했다. 마침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베트남 직원이 들어왔고, 지금껏 나를 도와 일하고 있다.


7. 유튜브, 또 다른 도전


그렇다. 내가 지금껏 해보지 않은 경험을 한 것이 불과 3-4년 안에 이루어진 것 같다. 40여 년 이상을 살아온 나에게 3-4년은 정말 짧은 시간이다. 앞으로 더 많은 경험이 나를 더 성장시키리라 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어제 하지 않은 일, 어제의 나보다 새로운 나를 맞이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두 달 전부터 유튜브 공부를 하게 되었다. 무려 550만 원을 들여 수업에 참여했고, 그 수업을 통해 현재 5개의 채널을 운영하게 되었다. 아직 미미한 성장을 보이고 있지만, 두 달 전과 지금의 나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두 달 전까지 나는 유튜브 제작자이기보다 소비자였다. 그런데 이제는 제작자의 입장에 서 있다. 불과 두 달 만이다.


이렇게 나는 이전까지 해보지 않은 새로운 경험을 통해 나를 발견해 나가고 있다.


8. 여전히 남는 부족함, 그리고 위로


그런데 문득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새로운 일과 경험, 공부는 좋아서 하기는 하는데, 과거의 경험과 지식이 턱없이 모자란 나로서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성과가 남들만큼 빠르지 않다는 생각에 가슴앓이를 하게 된다. 특히 나와 다른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의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나는 정말 모르는 게 많구나. 내가 여태껏 뭐 했나.' 하는 후회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가슴앓이를 하다가 오늘 미사를 통해 신부님의 강론 말씀에서 힘을 얻었다.


신부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가서 "저는 왕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왕은 "그러면 물 한 통을 들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나에게 오겠느냐? 단, 물 한 방울도 쏟으면 절대 안 된다"라고 말했고, 그 사람은 그렇게 했다. 왕이 다시 물었다. "너는 동네를 돌며 빨간색 옷을 입고 춤을 추며 지나가는 여인을 보았느냐?" 그러자 그 사람은 "물통의 물이 쏟아질까 걱정되어 주변 것은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충성스러운 종아, 잘했다. 네가 나의 말에 따르기 위해 물을 쏟지 않기 위해 주변 것을 바라보지 않았다니 너무 잘했다. 너는 충성스러운 종의 자격을 갖추었다"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통해 나는 교훈을 얻었다. 내가 하나의 것에 집중하다 보니, 어쩌면 세상의 다양한 경험과 지식에는 문외한일지 모른다. 부모님의 신앙, 부모님이 알려주신 하나의 방향대로 살아오다 보니 이것저것 부족한 부분이 인간적으로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신앙 안에서는 깨끗하고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영혼으로 살아왔다.


인간 세상에서는 내가 너무 부족하고 경험 없는 '순딩이'일지 몰라도, 내가 믿는 하느님 안에서는 착하고 성실한 종일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어 위로를 받았다.


내가 가야 할 길


내가 지금 나를 알아감에 있어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세상에서 많은 경험을 얻고 부를 누리며 사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더 나에게 값진 일이라고 한다면, 신앙의 삶을 온전히 사는 것이 나의 최종 목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 당장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 그리고 지금 당장 나에게 주어진 가족, 지인 모두를 진심으로 대하며 사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그 어떤 경험을 쌓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0대 중반, 늦게나마 좁은 세계에서 깨어나 새로운 경험들을 하고 있는 나. 여전히 부족하고 서툴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가장 소중한 경험이라는 것을.












재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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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net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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