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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해피 Nov 19. 2023

어릴 때 나는 조용한 아이였다

착한 딸의 불명예

부모님은 가정형편과는 상관없이 5남매를 낳고 기르셨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하시는 말은 열심히 성당을 다니신 신앙인으로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식은 다 낳아야 한다, 낙태는 죄다"라고 

자식이 많다는 질문에 어김없이 같은 답변을 하셨다.

 

나는 1남 4녀 중 셋째로, 오빠, 언니 그리고 나, 아래 두 여동생이

줄줄이 있었다. 오빠, 언니는 둘 다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나 또한

언니, 오빠를 따라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에 비해 첫째 여동생은 자기 성향이 언니, 오빠랑 나와는 전혀 다른

'돌연변이'였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건 다 하려고 했었고, 어릴 때부터

연예인이 되겠다고 떼를 써가며 경제적으로 힘든 부모님께 연예인 학원에

보내달라고 난리를 쳐가며 결국 1년간 학원에 다니곤 했다

그런 동생이 부럽기도 하고, 나는 왜 원하는 말을 하지 못할까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언니가 다니는 유치원에 다니고 싶었지만

엄마는 내가 유치원에 가야 할 나이임에도 전혀 관심도 기울이지

못하셨다. 어른이 돼서 한참만에 엄마에게 "엄마, 왜 난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어요?"라고 물으니 "네가 유치원에 안 갔냐? 왜 말 안 했어?"

라고 얘기해서 놀란 적이 있다. 엄마가 일부러 나만 유치원에 보내지 

않으신 건 아닐 테다. 먹고사는 일이 바쁜 나머지 5남매 하나하나 챙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말하지 않았던 내가 잘못이지. 나는 항상 그랬다.

유치원에 가고 싶어도 엄마가 힘들까 봐. 학교에서 선생님이 엄마 모셔오라

했어도 내 선에서 엄마가 바쁘실까 얘기도 안 했다가 선생님께 맞곤 했다

나는 부모님께 착한 딸이었다. 학교에서도 나는 친구들 앞에서 내 생각을 

제대로 말을 못 했다. 그런 나에게 친구는 거의 없었다. 어쩌면 이사를 자주

다닌 탓도 있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몇 개월 다니다 서울로 

전학을 갔었고, 서울 변두리가 싫다며 갑자기 몇 개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강남으로 전학을 두 번 가야 했다. 그 당시 강남에서 아이들이 많다며 또 다른

학교로 이동해야 했기에 한 학년에 3번을 전학 가야 했었다. 그런 변화무쌍한

환경에다 내 소심한 성격이 결국 친구도 제대로 사귀기 어려운 아이로

성장해야 했다. 나는 언제나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긴장을 하고 살았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두려움과 긴장감을 갖게 한 것이다.

집에서는 그나마 긴장을 놓을 수 있었지만, 내 마음도 돌봐주지 않는

상황, 엄마 아버지는 언제나 늦은 밤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내가 무엇이

힘든지 말할 틈도 없었다. 아니 일터에서 돌아온 부모님은 언제나 집에

오시자마자 말도 없이 주무시고 그다음 날 일찍 나가시곤 했다.

그런 시절을 겪다 보니 나는 내가 원하는 말을 그 누구에게도 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언제나 나는 자존감이 바닥인 상태였다. 

하루는 학교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에 내가 발표를 해야 했다.

그런데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그만 교탁에서 말문이 막혀

덜덜 떨어야 했다. 그런 나를 보던 선생님이 "00야, 왜 말을 안 해?

너 바보야?" 이러는 거다. 내가 선생님 말대로 바보가 되었다. 

말도 못 하는 벙어리, 바보말이다. 나는 그때 이후 학교에서 발표하는

시간이 찾아올까 봐 두려움이 가득했다. 학교 다니는 것이 지옥 같았다.

어떻게 학창 시절을 보냈나 싶을 정도로 학교생활이 정말 감옥에 가는

것처럼 싫었다. 그런 긴장감으로 학교를 다녀야 했으니 친구들 사귀기는

더없이 힘들었다. 가장 괴로웠던 시간이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그때부터 학급친구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친구들과 도란도란 짝을

이루어 맛난 도시락을 까먹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난 혼자서 덩그러니

맛없는 점심을 먹어야 했다. 그런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따갑게

느껴졌다. 가끔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같이 먹자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못 이기는 척하며 옆에 조용히 껴서 먹곤 했다. 

수업시간에는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를까 조마조마하며 수업을 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런 긴장감 속에 공부가 제대로 될 이가 없었다

어느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공부를 잘해야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고

선생님께도 칭찬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공부를 잘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공부가 제대로 

들어올 리 없었다. 그날 배운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선생님께

물어야 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이런 내가 참 싫었다.

학원을 다니면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힘든 부모님께

학원을 보내달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큰맘 먹고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 학원 좀 보내주실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가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받게 되었다. 

아버지는 "너, 소크라테스 말도 모르냐? 너 자신을 알라. 

우리가 학원 보낼 형편이냐? 학원 안 다니고도 공부 잘하는 사람들 많다. 

학교 수업시간에만 열심히 해도 공부 다 잘한다" 이러시는 거다.

나는 그때 이후로 아버지는 무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어느 휴일, 부모님은 우리 5남매를 데리고 해수욕장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지하철을 탄 우리 다섯 형제 중 첫째 동생이 그만 열차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내려야 할 역에서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모두 다 내린 줄로만 알았던 우리 부모님, 열차 문이 닫힌 후 열차가 느리게

출발할 그 순간. 동생이 사라진 걸 아셨다. 그 걸 바로 알아챈 우리 엄마.

그렇게 긴 열차를 두들겨가며, 열차를 세워달라고 소리소리치시는 거다.

정말 기적처럼 이 상황을 지켜보던 열차 안 승객들이 빠르게 승무원에게

연락해서 가던 열차를 억지로 세우게 하였다. 엄마는 열차가 서자마자

문을 열고 동생을 안고 열차 밖으로 나오셨다. 

그 사건 이후로 우리 형제들은

그 어디에도 놀러 간 적이 없다. 엄마는 더 이상 아이들이 사라질까 

두려워 그 어디에도 데리고 가시질 않으셨다.

나는 어린이날 어린이대공원, 동물원에 가고 싶었지만 

엄마는 아이들이 사라질까 두려워 그 어디에도 데려갈 생각을 

안 하셨다. 그런 탓에 우리 형제들은 다양한 경험을 할 수가 없었다

경험이 적으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루는 연예인이 되겠다던 동생이 뽀빠이 이상용 씨가 사회를 보는

바자회에 가서 춤대회에 나가자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동생은 사람들 앞에서

튀는 걸 매우 좋아했었다. 그런 동생이 부럽게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할 줄 아는 것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냥 나 혼자 있는 것이 편했다. 어디에도 나가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와 만나는

것도 싫었다. 지금 돌아보니 소아우울증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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