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과 지우개

마음의 상처를 지우다

by 바이즈

1.

오래전, VVIP를 모시고 한국을 여행했다.

여행 내내 그분은 항상 평온해 보였고,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았고, 한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을 텐데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내가 주변인을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큰 사업을 한다고 했고,

또한 동남아 어느 나라에 ‘사원’ 건립비용 전부를 통 크게 기부한 일이 있다고 했다.


당시 30대 초반의 나는,

’ 돈이 많으면서, 또한 행복하지는 못할 거야.’라고 생각했다.


2.

같이 여행을 했던,


다른 일행들은 일정이 생겨 모두 귀국했고,

마지막 날 서울에서 그분과 단 둘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분께 여쭈어 의사를 묻고,

‘제주산 흑돼지’라는 간판의 ‘광화문 인근 식당’에 들어갔다.


식사를 하며, 내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항상 당황하지 않으시고, 불평불만도 없으신가요?

혹시 어떤 비결이 있을까요?”


결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마음속으로 곱씹은 내 질문을 듣고, 그분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미얀마의 스승님께,

마음 칠판에 ‘과거의 상처’를 쓰고, 또 마음 ‘지우개’로 지우는 방법을 배웠어요.


그 방법을 한 동안 실천해 보니 보시다시피 이렇게 평온해졌어요.”


나는 더 궁금해졌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지 그분을 향해 바짝 몸을 기울이며 재촉했다.


그분은 내게,

천천히 그러나 매우 명확하고 간명하게 말했다.


“우선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과거의 상처를 ‘칠판’에 쓰는 거예요.

그리고 그 기억에서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입장이 되어봐요.

그럼, 그 '과거의 상처'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사라질 거예요.”


난 강하게 반발하며 말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면 과거의 상처가 사라진다고요? 그게 돼요?”라고 묻는 동시에,

내 마음속에서 ‘고등학교 시절’, 내가 상처라고 여겼던 일이 떠올랐다.


3.

80대의 할머니, 할아버지, 20대 후반의 사촌 누나, 그리고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6년 만에 나타나 뜬금없이 같이 살게 된 나.


어느 날 사촌 누나의 남편감이 집을 방문했고, 나와 한 방에서 같이 잤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 가기 전 아침을 먹고 있는데, 사촌누나의 남자 친구가 일어났고, 아침을 먹기 위해 밥상 앞에 앉았다.

그러자 할머니는 '끄응~!' 하는 소리를 입으로 내시며, 찬장에서 접시를 하나 꺼내 상에 올렸다.


‘소시지 반찬’이었다.


내 마음에 온갖 소동이 일어났다. ‘절대 저 소시지는 먹지 않을 거야. 저 소시지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야. 아! 또 이렇게 차별을 당하는구나!’등등의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일은 내 마음에 상처로 자리 잡았고, 십 수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기억이 떠오르면 온갖 서운한 마음이 들어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가 원망스러웠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도 휘몰아쳤었다.


그런데, 그분 말처럼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았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할머니'의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30대의 나로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았다. 30초 만에 내 입에서 '아!' 하며 이해가 되었다.


80대 노부부, 딸처럼 키워온 손녀딸, 그리고 손녀딸이 남편감으로 집에 데리고 온 다음날 아침.


넉넉하지 않았을 살림에 '손님'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을 주고 싶었던 할머니의 그 마음, 손주에게는 미안하지만 꺼낼 수 없던 소시지 반찬......


눈물이 흘렀다.


'과거의 상처' 하나가 '이해'를 통해 '칠판지우개'로 지워졌다.


4.

그분을 다음날 공항으로 모셨다.


그분께 작별의 손을 흔들며 내가 말했다.


"칠판과 지우개, 잘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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