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을 사람들은 하늘에 빈다.
나에게 있어 ‘하늘’은 늘 ’ 인연’이었고,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었다.
1.
첫 번째 행운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을 ‘짝사랑’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난 내가 할 수 있는 온 마음을 담아 선생님께 약 5통의 ‘러브레터’를 썼다.
물론 내가 그때 선생님께 쓴 러브레터의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다.
선생님으로부터 ‘삐삐’가 왔다.
만나자고 하시며, 장소를 알려주셨다.
약속 장소로 가는 내내 심장이 두근거려 가슴을 꼭 붙잡아야 했다.
테이블에 ‘커피 두 잔’이 올라왔다. 커피가 아닌 어떤 다른 ‘차’였을 수 도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편지를 잘 읽었어. 선생님은 네가 대학에 갔으면 좋겠어.
선생님이 학원비를 댈 테니 입시학원에 등록해서 수능 공부를 할 수 있겠니?
선생님이랑 약속하자!, 꼭 대학에 가겠다고…..”
내가 답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2.
난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녔다.
전공은 ‘건축과’였다.
소위 공부 못하는 말썽쟁이들이 모인다는 학교에 새롭게 1회로 다시 시작된다는’ 건축과’를 지원했고,
건축과 52명 중, ‘38등’의 제법 뒤에 속한 성적으로 어렵게 입학했다.
강원도 홍천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난,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대도시?’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동안은 홍천에서 매일 고속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학교에 도착하면 이미 졸음이 쏟아지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내게 제안을 했다.
이미 오래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연락조차 하지 않았던,
친가의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사촌누나가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당시의 나에게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할머니 댁에서 고등학교 1학년을 얹혀서 살게 되었다.
3.
학교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실습시간에는 하루 종일 ‘건축제도’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여러 종류의 필기도구가 필요했고, 샤프를 잘 돌려서 선을 균일하게 작업하는 기술?을 습득했다.
많은 도면을 그렸다.
난 생각보다 도면을 깨끗하게 잘 그리는 학생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면, 마음이 불편했다.
할아버지 방에 한 대 뿐인 텔레비전은 내가 건드릴 수 없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다.
할머니 댁에 살게 된,
이것이 나의 두 번째 ‘행운’이었다.
당시에 ‘깨비 책방’이라는 것이 유행했다.
나에게 ‘깨비 책방’에서 빌리는 한 권의 ‘책’은 쓸쓸한 무료함을 '넓은 세상을 비추어 주는 거대한 창문'처럼 화창한 즐거움으로 바꿔 주었다.
깨비 책방에서 처음 빌린 책을 아직도 기억한다.
‘로빈 쿡’이라는 의학 소설 전문 작가가 쓴 ‘열 fever’이라는 작품이었다.
한 동안 ‘로빈 쿡’에 빠졌고, ‘존 그리샴’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었다.
어느 정도 외국소설을 읽고 난 후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담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다.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조안리’ 작가가 쓴 ’ 29살의 사랑 49의 성공’이라는 자전적 에세이였다.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 내내 ‘깨비 책방’에서 책을 빌렸고, 거의 매일 한 권, 적어도 3일에 한 권씩 책을 읽었다.
4.
고등학교 1학년 첫 중간고사가 끝났다.
며칠 후 담임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셨다.
‘2등’ 축하한다고 하시며 나를 일으켜 세워주셨다.
반 아이들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따뜻하고 남자다운 성격의,
당시의 담임선생님께서 내게 말씀해주신 ‘잘했다’는 칭찬을,
난 잊을 수가 없다.
할머니 댁에서 TV를 보지 못해 무료해서 책을 읽었더니,
38등으로 입학한 내 성적은 2등으로 변해 있었다.
결국 1학년 기말고사는 1등이었다.
그래서 난 고등학교 내내 1등 혹은 2등이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인생은 참 아이러니한 것 같다.
5.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파트 1층 자전거를 주차하는 계단참 공간에 내 짐들이 나와있었다.
짐은 ‘서랍장 한 개’ 그리고 내 동복 교복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 동복 교복 외투가 없었다.
나중에 선배들을 통해 중고로 내 몸보다 약 1.2배 정도 헐랑한 외투(마이)를 새롭게 구입했다.
할머니로부터 연락을 받았었던 것 같다.
급히 이사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 현장에는 어머니도 함께였다.
나와 어머니는 말없이 짐을 들고, 고등학교 근처의 월세방을 찾았다.
이 날부터 난 혼자 ‘자취’라는 것을 처음 시작했다.
5.
‘자취’라는 말은 재미있다.
스스로 취사를 한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난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스스로 밥을 해 먹고 도시락도 직접 만들어야 했다.
TMI일 수 있지만,
내가 당시에 만든 ‘카레 레시피’를 여러 분들께 전하고 싶다.
아주 간단하다.
카레가루 그리고 야채참치만 있으면 된다.
그럼 야채와 참치가 들어있는 맛있는 야채참치 카레가 된다.
이 카레는 약 일주일 간 매일 먹을 수 있다.
난 당시에 ‘잔머리’를 사용하여 최대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많이 개발했다.
그리고 요리는 정말 하다 보면 느는 것 같다.
뭐든 하다 보면 잘하게 된다는 것을 당시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도시락도 재미있다.
밥만 싸가면 된다.
나에겐 친구들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반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6.
고등학교 2학년 자취를 하게 되면서,
‘깨비 책방’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 있는 도서관의 책들을 무료로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어니스트 허밍웨이’, ‘헤르만 헤세’, ‘톨스토이’등의 세계적인 대문호들이 쓴 책들을 읽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 소설가의 책들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처음 읽은 한국 소설가의 책이 ‘이문열’ 작가의 ‘사람의 아들’이었다.
이문열 작가가 쓴 모든 책을 찾아서 읽었다. 그리고 공지영 작가, 이외수 작가 등등 우리나라 작가의 소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내 꿈은 ‘소설가’였다.
7.
고등학교 2학년의 겨울이었다.
기름을 넣지 않아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았다.
자는 내내 내가 내뿜는 입김을 바라보는 신기한 경험을 하였다.
그다음 날 아침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반드시 내 방에서 잘 필요는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근처에 있는 친구의 하숙집에서 자는 것으로 따뜻하게 겨울을 잘 보낼 수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날 자기 방에서 재워준 친구가 참 고맙다.
당시에는 ‘고마운지도’ 몰랐다.
8.
선생님과 약속을 한 다음날.
난 시내에 있는 입시학원에 등록했다.
입시학원의 한 달 학원비는 기억하기에 23만 원이었다.
동시에 ‘독서실’을 등록했다.
영어 사전 한 권을 들고 독서실에 들어가 하루 8시간씩 사전을 외웠다.
3개월 동안 영어 사전만 달달 외웠다.
입시학원은 결과적으로 딱 한 달을 다녔다.
내가 등록한 독서실의 실장님께서 하신 한 마디 말씀 때문이었다.
당시 독서실 실장님이 말했다.
“넌 독학하는 스타일이야.”
내가 말했다.
“넵. 그럼 독학하겠습니다.”
그렇게 난 독서실 총무가 되었다.
독서실 총무가 되니, 독서실비가 ‘공짜’였다.
독서실에서 실장님을 만난,
이 것이 내 세 번째 ‘행운’이었다.
9.
독서실 실장님은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지신 분이었다.
해박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 독서실의 총무를 한 적이 있는 역대 총무들은 모두 ‘SKY’를 입학했거나,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난 이 독서실의 ‘마지막 총무’였다.
솔직히 지금도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꼽으라고 한다면,
난 주저 없이 이 순간을 꼽고 싶다.
독서실 총무가 된 바로 이 날을 말이다.
실장님은 나에게 교과를 가르쳐주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일러주셨다.
그리고 내게 중학교 책부터 공부라 하고 알려주셨다.
중학교 수학책, 과학책, 역사책 등 중고서점에서 책을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내 옆에는 항상 국어사전이 있었다.
기초가 부족해서 모르는 단어가 너무나 많았다.
시간은 흘렀고, 수능을 치르게 되었다.
별로 긴장하지 않고 평소대로 치른 수능이었다.
10.
입시학원에서 3월에 처음 본 모의고사의 수학 점수는 80점 만점에 4점이었다.
이 말은 전부 틀리고 딱 2문제를 맞혔다는 뜻이다.
99학년도 실제 수능의 수학 점수는 20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난 99학년도 입시에 불합격이었다.
‘사범대학 한문교육과에 불합격하셨습니다.’
당시 사범대학 앞에 공중전화 박스가 있었다.
그 공중전화 박스에서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재수를 할 것인지, 군대를 갈 것인지 선택을 해야 했다.
실장님은 나에게 ‘재수’를 하라고 권하셨다.
그래서 난 ‘재수’를 선택했다.
11.
재수를 시작한 나는 ‘재수생’이 되었다.
완전한 ‘독서실 총무’가 되었다.
매일의 일과는 동일했다.
오전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독서실에 있었고,
일주일의 공부 계획서대로 공부했다.
수학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학 정석을 꼼꼼히 공부했고,
결국 미적분까지 풀 수 있게 되었다.
재수를 하는 동안 ‘한자’를 공부했다.
매일매일 ‘펜글씨’로 쓰면서 한자를 익혔고,
‘채근담’을 읽었다.
한자를 공부하면서, 더 이상 ‘국어사전’을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단어의 의미를 자동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은 내 꿈의 방향을 설정하게 했다.
‘한문교사’가 되어야겠다.
그래서 나처럼 공부할 기회를 박탈당한 학생들에게 ‘한자’를 가르쳐서,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는 기초를 다져주고 싶었다.
이 결심은 점점 확고해져만 갔다.
‘수학’은 정말 내게 큰 걱정거리였다.
길을 걸으면서도 ‘수학 문제’를 풀었다.
어느 날은 잘 풀렸고, 어느 날은 풀리지 않아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재미있는 것은,
재수 후 첫 모의고사에서 300점을 넘었고,
내가 본 모든 모의고사의 성적은 그 전달보다 조금씩 올랐으며,
마지막 본고사에서도 그 전 달보다 성적이 올랐다.
12.
00년도 수능날이 되었다.
99년도와는 다르게 어마어마한 긴장감 속에서 시험을 치렀다.
수학 문제를 받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문제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또 이렇게 실패하는 것인가?’하는 의구심, 두려움이 몰려왔다.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귀에서 ‘실장님 목소리’가 들렸다.
3번, 2번, 4번……..
귀를 의심했다. 뭐지? 이 희한한 일은….
마음속으로 ‘애라 모르겠다’ 싶어서 그냥 귀에서 들리는 번호를 받아 적었다.
수학 시험 시간이 한 참 남았는데,
이미 문제에 답을 다 적었다.
20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몇 문제를 내가 다시 풀었고,
답을 고쳤다.
수학 시험이 끝났다.
모든 시험이 다 끝났다.
시험을 마치고 독서실로 돌아가는 길에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재수하는 내내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수학을 또……..
독서실에 도착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정답 오답을 맞추었다.
물론 말도 안 되지만,
지금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고친 몇 개의 문제를 제외하고 ‘귀에 들린 답’은 전부 ‘정답’이었다.
내 인생 중 수학에서 최고 점수를 받은 순간이었다.
13.
사범대학 앞의 공중전화에 두 번째로 서 있었다.
“한문교육과에 합격하였습니다.’
14.
나중에 알게 되었다.
수석입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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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나에게 하늘은 항상 ‘사람’이었고,
‘인연’이었으며, 그것은 ‘존경, 그리고 더도 덜도 아닌 사랑’이었다.
그분들을,
난 지금도 깊이 ‘감사’하며 존경하고 그리고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