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자동차 후기
1.
앞서 연재한 ‘스트레스라는 이름의 검정고양이’를 쓰기 전부터, 제 마음에 뭉실뭉실 떠올라 구상된 이야기입니다.
‘마음자동차’는 마음과 몸을 함께 지칭하기 위해 두 단어를 합성하여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만약, 몸이 없다면 마음도 없을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둘은 뗄 수 없는 관계이며,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과 몸을 동일한 관심으로 바라보아 주기를 바라는 의도를 담아 설정하였습니다.
글의 마지막 부분에 묘사했던 것처럼 젊은이는 ‘의식’을 대변합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설명처럼,
우리의 몸은 몸 스스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오감을 통해 경험하며, 오감은 마음을 통해, 마음은 의식을 통해 경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 = 의식’은 ‘마음자동차 = 몸과 마음’을 잘 운전하고 싶어서 운전면허 교습소를 찾아옵니다.
우리는 의식으로 몸과 마음을 경험합니다.
특히 우리는 의식의 무한한 에너지장에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마음이라는 녀석을 통제하지 못하여 아주 골치 아파합니다.
그래서 어떤 선생님이 당위적으로 필요해집니다.
마찬가지로 글의 말미에 ‘노인’은 ‘자각’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의식은 자각에 의해 경험됩니다.
의식은 마음을 경험하고, 자각은 의식을 경험합니다.
자각은 명료하게 의식을 지켜보는 관찰자이자, 우리 내면의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인 = 자각’은 ‘젊은이 = 의식’을 지도하는 선생님으로 설정하였습니다.
글에서 ‘자각’은 ‘의식’에게 ‘표면 의식’에서 ‘잠재의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며,
그것은 실질적인 연습이 필요함을 여러 번 반복하여 당부합니다.
2.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의식적으로 ‘관찰’할 수는 있습니다.
마음을 의식적으로 관찰하는 연습을 지속하면,
그것은 마치 운전연습과 실제 주행의 경험이 지속되면,
잠재의식에 뿌리를 내려, 일종의 질적 도약으로 ‘자연’스럽게 운전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그 관찰은 ‘자동화’ 됩니다.
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의식적으로 관찰하고,
그 관찰이 지속되면,
결국 '관찰'만 남게 됩니다.
그 관찰, 그 바라봄, 그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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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음에는 들음만,
맛봄에는 맛봄만,
느낌에는 느낌만,
냄새 맡음에는 냄새 맡음만,
봄에는 봄만이 있다. 그것을 보는 자는 없다.’
라고 말입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