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적는다.

by 고순

창밖의 빛이 커튼 틈 사이로 미세하게 들어오는 어두운 방. 금이 간 무드등의 약한 불빛 앞, 의자에 앉아 일기를 쓰고 있다. 키보드 옆 왼쪽에는 《사람을 얻는 지혜》 책이 펼쳐져 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통찰력이 담긴 인생의 조언 300가지가 적혀있는 책이다. 나는 매일밤마다 한 챕터씩 읽고, 그것에 대한 느낀 점을 쓰고 있다. 그 옆에는 영화 《UP》에 나오는 강아지 더그 인형이 내 오른쪽 볼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총명하고 귀여운 눈이 조명 때문에 광기가 담긴 눈처럼 보여 스산하게 느껴진다.


큰소리로 재채기를 했다. 콧물이 차오른다. 나는 이렇게 갑자기 재채기를 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쉴 새 없이 콧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재채기도 몇 번 더 한다. 코를 풀고 정신을 차린다. 오늘 있었던 일과 생각들을 하나둘 적어간다.


아키토리의 육즙에 감탄했다. 모든 고기의 맛은 육즙이 좌우한다. 바싹 조린 고기가 맛이 없는 것은 다 그런 이유다.

이상하게 나온 인생네컷 사진의 대해 미련이 남는다. 분명 잘 나온 사진인데 아쉬움만 생각하고 부족한 것만 생각하는 내 마음과 입이 문제겠지. 이미 지나간 일은 그대로 넘겨버리자. 좋은 것만 생각하고 좋은 말을 먼저 하는 사람이 되자.

유니클로에서 산 딱 맞는 카디건 때문에 오늘 어깨가 좁아 보인다. 아, 그때 할인된 가격에 혹해서 샀는데 맞지 않는 옷을 —더 큰 사이즈는 품절이었다— 입으니 이런 역풍을 맞는구나. 가격에 휘둘리지 말고 입을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피시방에서 한게임플래시를 잠깐 했다. 게임을 하면서 초등학교 시절, 집에서 누나와 컴퓨터 앞에 앉아 하하 호호하며 놀았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런데 지금 내 마음은 무미건조하다. 그때의 순수함은 어디로 갔는지. 이런 단순함에 빠져드는 것도 즐기지 못해 버린 나. 이 모든 것들이 슬프다. 슬퍼…

오늘 눈가의 주름이 일렁거리고 얼굴이 초췌해 보인다. 그 이유는 어제 새벽 늦게 잠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탱탱한 피부는 수면 질에 달려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일찍 자자. 생체리듬을 자연에 맞춰야 한다. 설상가상 일찍 못 일어나더라도 부족함 없이 자자.

외출한 날은 쓸 내용이 평소보다 더 많다. 떠오르는 생각도 하고 싶은 말도 많아지는 것 같다. 역시, 사람은 밖에 나가서 몸으로 직접 느껴야 하는 건가.


피곤하고 졸려서 일기를 짧게 쓰려고 했는데 막상 쓰다 보면 이렇게 이것저것 쓰게 된다. 나는 일기를 내일로 미루고 싶지 않다. 어제의 기억을 붙잡고 다음날에 일기를 쓴다는 것은 내게는 미련 같다. 내일이었다면 절대 이런 기분으로 쓰지 않았겠지. 일기장을 덮고 침대에 눕는다. 기분 좋게 잠들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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