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난임부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2년차 난임부부가 되었다.
결혼한 지 벌써 7년이 넘었다. 우리의 신혼은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처음 몇 년간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고, 신혼을 제대로 만끽하자고 합의했었다. 그래서 철저히 피임을 했었다.
당시 나는 여행업에 종사하고 있어,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그렇게 분기마다 해외여행을 즐기고 그렇게 신혼 생활을 즐겼었다. 피임이란 단어조차 낭만적으로 들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코로나19가 훅~ 들어왔다. 여행업은 순식간에 멈췄고, 어쩔 수 없이 3년 가까이 휴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집에 머물다 보니 별의별 생각이 머리속에 맴돌았다. 특히, "아, 이때 아이를 가졌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내가 집에 있는 동안 육아를 하면 얼마나 편했을까?" 이런 생각 들이 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신혼을 즐기자"라는 마음뿐이었다. 이제 40대를 앞두고 나니, 문득 아이가 없다는 사실이 가슴 한편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늦었지만 부모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배란일에 맞쳐 숙제를 진행하였다.. 두 세번의 시도면 바로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6개월이 넘도록 임태기의 두줄은 보지 못하였다.
결국 아내와 함께 난임 병원을 방문하여 시험관 시술을 받기로 결정하였다. 병원에서 남편인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굴욕의 방’이라는 작은 방에 들어가 정자를 채취하고 검사를 받는 것 정도이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매일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며 몸과 마음으로 버텨야 했다. 그녀의 고단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웠다.
그럼에도 우리는 행복했었다. 당연히 '한방에 성공할 거야'라며 시험관을 하면 바로 임신이 되는 줄 알았다.
아기의 태어난 달과 띠를 계산하고, 육아휴직과 복직 계획까지 마치 준비된 부모처럼 설계했다. 이런 상상 속에서 우리는 함께 웃고, 희망을 나누며 미래를 꿈꾸었다.
오산이였다.
그러나 첫 번째 시술의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착상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소식은 우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우리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현실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무겁고 복잡했다.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두 번째 시술을 시작 하였다. 이번에는 착상이 이루어졌다는 희소식이 있었다.그러나 HCG 수치가 10대로 나왔다고 한다. 결과를 듣고, 그나마 작은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하루종일 네이버 카에서 극적으로 임신이 된 케이스를 찾아 보며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께서는 담담히 말씀했다.
“착상이 된 것은 가능성을 보여주긴 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을 것입니다. 화학적 유산으로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화유’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임신이 되었는데도 아이가 자연스럽게 사라져야 한다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감정을 추스르기도 전에 더 복잡해졌다. 화유가 자연스럽게 진행되지 않아, 계속해서 피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수치가 50대, 80대로 올르긴 했다. 저는 괜스레 희망을 품었다. “혹시 이 아이가 끝까지 버텨서 1000, 2000으로 올라가는 거 아닐까?”
그러나 수치는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았다. 자궁 외 임신일 가능성까지 거론되며 새로운 걱정이 찾아왔다. 아내는 이틀에 한 번씩, 출근 전에 병원에 들러 피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던 어느 날, 다행히 수치가 점차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고, 그렇게 이번 여정은 끝났다.
우리는 이렇게 난임이라는 지루한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