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동갑 동기 녀석이 아이팟 한쪽을 쑥 내밀었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형 노래 너무 좋지 않아요?"
이제 서른 인 이 녀석이 내 맘을 후벼 판다.
가사는 나의 심장을 툭 건드렸다.
슬플 때 듣는 모든 노래는 내 가사라고 했던가?!
그 순간 그 노래는 온전히 나의 독백 같이 느껴졌다.
나 역시 그랬다.
나는 내가 머라도 되는 줄 알았다.
코로나 시절 여행업은 멈추었었다.
당시 여행업계는 구조조정과 휴직이 일상이었다
나 또한 3년 정도 쉬었다.
그러나 아내의 안정적인 직장과 당시 투자하면
모든 자산이 다 오르던 시절이라 큰돈은 벌지 못했지만 먹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오전에 골프연습장, 오후엔 카페투어 하는 등
어설픈 건물주 흉내를 내며 시간을 보내었다.
코로나가 끝날 무렵 익숙했던 그곳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40대에 온다는 매너리즘과 비슷한 짬밥의 몇몇 동료들이 정치질을 시작하였다.
예전 같으면 발끈했겠지만,
코로나를 겪고 보니 조용히 있는 게 더 현명하단 걸 깨달았다.
그리고 문득 공기업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신입으로 가도 될까라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당시 휴직 중 9급 공무원으로 빠진 주위동료들이 많아
물어보니 상관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었었다.
아무튼 그냥 한번 도전해 볼까 하는 마음으로 시험을 쳤는데 합격이 된 것이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면접도 통과되었다.
미안하지만 약간 동안(?) 외모덕을 봤다고 생각한다.
설마 될 줄은 몰랐다.
고민과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익숙했던 이곳을 벗어나 이직을 선택하였다.
코로나 휴직 3년을 겪은 동료들이라
나의 이직사실은 동료들에게 부러움을 샀다.
그렇게 제2의 삶을 시작하였다
처음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젊은 동기들과 함께하는 신입 생활은
정말 오랜만에 겪는 신선하고 유쾌한 경험이었다.
마치 대학교 새내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거기까지였다.
부서에 배치받으니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공공기관 특유의 그 무겁고 조용한 침묵,
사회 경험이 부족한 어린 선배들의 불편한 시선과 은근한 기싸움.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 웃어넘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야금야금 에너지를 갉아먹는 기분이었다.
전 직장에선 감히 나에게 말도 못 거는 짬밥(?)의 아이들인데
나름 15년의 직장 경력에 석사인데..
이딴 건 여기서는 먹히지 않는다
이직 후 깨달았다.
내가 이전에 필드에서 하늘을 날아 우주로 로켓을 쏫았어도,
이곳에선 나이 먹고 새로 들어온 ‘듣보잡’ 신입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처음엔 억울했다.
왜 나는 이렇게까지 내려와야 하나, 싶은 마음도 있었고,
‘내가 뭘 잘못했지?’라는 좌괴감에 시달렸다.
이 와중에 여행업으로 돌아가는 제안도 있었고 생각도 있었지만
섣불리 결정할 수도 없었다.
공기업이라는 사회적 안정감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시행했던 우리의 시험관 시술은 계속 실패하였다.
거기서 나는 무너졌었다.
결국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혹시 현실을 도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때로는 멈춤으로써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누구나 주인공일 순 없고,
어떤 인생은 조연처럼, 때로는 배경처럼 지나간다는 걸.
그걸 인정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요즘은 그냥 내 자리를 지킨다.
나의 하루는 소소한 일상으로 채워진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음미하고, 아내와 러닝 하고,
서툰 솜씨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조용히 글을 쓴다.
그리고 문득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나도 한때는 대단한 놈인 줄 알았지.’
이제는 아니지만, 그게 뭔 상관이 있나 싶다.
인생은 어차피 흘러가고,
나는 그 흐름 속에서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