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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색 자전거 Sep 11. 2023

2. 자아는 어떻게 자라나는가 (2)

우리같은사람들 《그 많던 일기는 그저 글자가 되고》/ 인디한 가사 분석

《그 많던 일기는 그저 글자가 되고》 앨범 표지


우리같은사람들 - 《그 많던 일기는 그저 글자가 되고》
잔잔한 나의 일상 속 바람이 불어 닿았죠
바람은 파도를 만들어 시도 때도 없이 일렁거리네
그대 내 맘을 유람하는 구경꾼이었나
비춰 보인 내 마음은 볼품이 없었나
빙빙 돌아 엉켜버린 실타랠 푸는데
얼마나 걸릴런지는 모르겠네요
낯설은 나의 모습 속 빼곡히 적은 일기는
의미 없는 글자가 되어 아픔으로 기억에 남게 했네
그대 내 맘을 유람하는 구경꾼이었나
비춰 보인 내 마음은 볼품이 없었나
빙빙 돌아 엉켜버린 실타랠 푸는데
얼마나 걸릴런지는 모르겠네요


앞선 목차인 「1. 작품에 등장한 일기의 역할과 의미」에서 일기는 자아를 완성하는 도구이고, 본 작품에서 '비춰보인 내 마음'을 구성하는 도구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렇게 자아를 쌓은 작품의 화자는 곧 타자를 만난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까? 화자는 타자를 만나 무엇을 느꼈을까? 지금부터 시작해 보자.




2. 빼곡히 적은 일기가 의미 없는 글자가 된 이유


1에서 일기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면 작품의 '빼곡히 적은 일기'는 무엇을 의미할까? 쌓아온 자아를 나타내고 있다. (일기 자체는 자아를 쌓는 데 활용된 도구이지만, 작품에서는 자아와 동일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빼곡히 적은 일기'는 '의미 없는 글자'가 된다. 왜? 작품의 맥락 상, 그대라는 구경꾼에게 비춰보인 내 마음이 볼품없었기 때문이다.


그대 내 맘을 유랑하는 구경꾼이었나
비춰보인 내 마음은 볼품이 없었나


사랑하는 이에게 볼품없다고 여겨진 내 마음은, 빼곡히 적은 일기를 의미 없는 글자로 바꾼다. 일기의 의미는 일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 부여는 타자의 시선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대한 자신의 의미부여가 타자의 시선을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건데, 왜 다른 사람이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지? 그런 건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사람의 특징일 뿐이야."처럼 말이다.


이에 대해 나도 명확한 증명이 어려움을 밝힌다. 하지만 일반적인 타자에 대한 위의 논증은 미루고, 그 타자로 사랑하는 사람만을 한정한다면 이는 누구도 반박하기 어려운 주장이 된다. 사랑하는 이의 시선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이렇게 화자는 상처를 입었다. 이제 화자는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의 자아가 모두 부정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되는 걸까? 아니면 자아를 다시 회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될까? 이것에 대해 확실하게 답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내가 처음에 마땅한 인사이트를 추출하지 못한 작품 초반의 가사들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작품 분석의 마지막 질문을 펼쳐보자.


3. 작품 너머, 화자가 맞을 미래


작품은 다음 가사로 시작한다.


잔잔한 나의 마음 속 바람이 불어 닿았죠
바람은 파도를 만들어 시도 때도 없이 일렁거리네
그대 내 맘을 유랑하는 구경꾼이었나


일반적으로, 사랑은 사랑의 대상과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동인이 동일하다는 전제 아래에서 묘사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책임을 묻는 작품이 많지 않던가.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을 불러일으켰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다르다. 이 작품에서는 사랑의 대상과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동인이 구별되어 있다. 사랑의 대상인 그대는 '구경꾼'이고, 사랑의 은유인 '파도'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람'이다. 둘의 구별이 너무도 분명하다. 왜 이렇게 서술된 것일까?


나는 이것이 작사가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작사가가 작품 바깥에서 작품을 감싸는 프레임을 통해 모종의 기대감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어떤 기대감인가? 또 다른 만남에 대한 기대감이다.


만약 글의 구조에서 사랑의 대상과 동인이 같았다면, 작품을 읽고 내용 이후의 긍정적인 에필로그를 생각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은 끝났고, 사랑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떠났다. 작품 이후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본 작품의 구조에서는 사랑의 대상과 동인이 구별되어 있다. 내 마음엔 아직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렁거린다. 새로운 구경꾼을 기대할 수 있다. 화자에게 긍정적인 소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작품 내에서, 아파하는 화자를 보고 있다. 화자는 상처를 회복해야 한다. 언제쯤 상처를 회복할 수 있을까? 회복의 주체인 화자는 그것에 대해 알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실연의 상처에서 언제 회복할 것이라 단정 짓는 이는, 이미 충분히 회복했으니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가사를 살펴보자.


빙빙 돌아 엉켜버린 실타래를 푸는데
얼마나 걸릴런지는 모르겠네요


내 마음이 왜 볼품없다고 여겼을까? 내 노력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그냥 자아의 토대인 내가 잘못된 걸까? 끊임없이 생각할 것이다. 시쳇말로 '꼬였다'는 말이 있는데, 화자는 그것처럼 스스로 꼬여 지속적으로 내상을 입을 것이다.


이 상처는 언제 나을까. 그것은 화자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서두에 언급하였듯, 나는 '헤어졌다고 해서, 만날 때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들이 모두 의미 없게 되는 걸까?'라는 의문에 대해 부정적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 인정하지 않았다고 내 자아가 의미 없게 되는 것 또한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상처가 다 나아, 만나고 헤어졌던 모든 일들이 화자의 자아 속에 깃들 것이다. 그리고 그 봄날에 새로운 구경꾼을 맞이할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하고, 책도 읽고, 때로는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한다.

그것은 모두 나를 이해하는 과정의 일부분 아닐까.


내 분석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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