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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세탁실 그 사람

휴식이 뭔데요.

by 남선우


21년 가을학기, 매주 금요일 저녁 지하 세탁실에는 엘리베이터 근처 책상에 앉아 노트북과 공책을 펴고 세계사 공부를 하는 학생이 있었다. 세탁실은 그 시간대가 가장 인기여서 지나가는 사람도 꽤 있었고 아는 사람도 마주쳐서 조금은 민망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사람은 매주 그곳에서 공부를 했다. 자신의 빨래가 다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공부하는 모양이었다. 같은 건물에서 지내는 기숙사생이 방에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걸린다고 그 불편한 데에서 그랬을까 싶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 학생이 바로 나다.


당사자로서 설명을 덧붙이자면, 지하 세탁실에서 빨래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서 세계사 복습을 했다. 노트북과 공책을 들고 내려가서 앞에 놓여있는 책상에 앉아 그 주 수업 내용을 정리했다. 영어로 된 끊임없는 실시간 수업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했고 필기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매주 시험을 본 것도 아닌데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무조건 했다. 벼락치기는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더 솔직히는, 그 방대한 양의 영어로 된 교재를 며칠 만에 정리할 엄두가 안 났다.


굳이 세탁실에서 한 이유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시간도 아까웠고 흐름이 끊기는 것이 극도로 싫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쳐다보는 것도 조금 뻘쭘했고 아는 사람이 말 거는 것도 민망했지만 그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했다. 엘리베이터를 통한 수직 이동 시간을 아끼기 위해 계속 그곳에서 공부하지 않은 이유는 지하세탁실이 너무 지저분했기 때문이다...


나의 유학 목표는 단 하나였다. 학업에 열중하여 최대한 잘 졸업하기. 고백하자면, 수능 공부할 때보다 열정이 불타 올랐었다. 특히 초반에는 더욱 그랬다.


그것이 하루 종일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공부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아침 5시나 6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간단히 먹는다. 그리고 오전 9시까지 교양 과제의 읽기나 쓰기 과제를 한다. 그 후 수업을 가거나 없으면 스튜디오에서 전공 과제를 한다. 점심 식사 후에도 수업을 가거나 스튜디오에 있었다. 작업실에 학생들이 슬슬 오기 시작하면 나는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식사 후 마저 교양 과제를 하거나 복습을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주말에도 조금 여유로운 저녁을 제외하면 거의 똑같은 일과였다.


지금 봐도 스스로 놀랍지만 과장이나 생략은 없다. 밥 먹는 시간, 밥 하는 시간, 잠자리 준비하는 시간, 수업 시작 전 잠깐 비는 시간이 거의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아, 수업 중 쉬는 시간이 있었다면 그것까지 포함해서. 지금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싶다. 아니, 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힘든 줄을 몰랐다. 피곤하긴 했지만 견딜만했다. 오히려 하루를 알차게 보낸 것 같아 뿌듯했다. 당연히 결과도 상당히 좋았다. 그러나 결국 번아웃을 겪었고, 극복하느라 정말 많이 고생했다. 이제는 열심히 하는 것이 휴식 없이 나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이랑은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지금은 지치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도록 균형을 잡으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잘 안다. 유학을 하면 여러 가지 부담이 정말 많고 그만큼 누구보다 학업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선택한 길이지만, 한 번에 연료를 다 써버려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은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그곳에는 나를 돌봐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건강이 우선임을 잊지 말기를 바라고 부탁한다.


유학 생활도, 인생도 장거리 달리기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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