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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중 생일에는 미역국을 끓이자.

눈물의 생일

by 남선우

나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대학교 졸업까지 매년 생일에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한다. 고등학교 1, 2학년 생일에는 항상 중간고사를 봤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독서실에 있다가 부모님과 저녁으로 중식을 먹었다. 재수 시절에는 한 대학교에서 논술시험을 봤다. 대학교 3학년 때는 중간기간 발표를 했고 4학년 때도 중간기간이었다. (왜 다 시험...?) 8년 동안 생일에 놀았던 기억은 대학교 합격 통지서를 받은 후 아빠와 할아버지와 설악산에 간 날뿐이다.


이랬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기후도 적당하고 좋은 달에 태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커서는 저주받은 날인가 싶기도 했다. 이 생각이 정점을 찍은 때는 유학 생활 중이었다.


실제 캠퍼스에 온 지 얼마 안 된 때라 2학년 가을학기에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1학년 때 온라인 수업에서 본 한국 언니들이 그나마 아는 사이였다. 나는 뉴욕에서 보내는 첫 생일에 살짝 들떠있었다. AZ와 외국친구들과는 주말에 외식하기로 했고, 그 한국 언니들에게도 미리 연락했다. 이 때도 역시 중간기간이었기에 방해하기는 싫어 가까운 데서 밥이나 먹자고 했다. 그런데 웬걸, 언니들이 그것으로 되겠느냐면서 다운타운으로 나가서 놀다가 오자고 했다. 기뻤다. 엄청 친한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적극적으로 축하해 주려는 것 같았다.


신난 나는 미리 생일 날 할 일도 전 날에 다 끝내놓고 오래간만에 치장도 하고 나갔다. 그런데 가자마자 속상한 말을 들었다. 과제가 많아서 밥만 먹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되려 너는 과제가 없냐고 반문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놀자고 한 건 언니들인데? 그것 때문에 과제 미리 끝내느라 여태 쉬지도 못했는데?


결국 저가의 한식집에서 테이크아웃을 해 근처 벤치에 앉아 먹고 바로 헤어졌다. 어이 없게도, 한 사람이 백신카드를 안 갖고 와서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작은 일로 우울해지기가 싫어 혼자 좋아하는 공차도 사서 힘차게 기숙사로 돌아가려 했다. 날씨도 좋았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앉으니 너무 속상했다. 할 일도 다 끝내놔서 할 것도 없으니 계속 그날 일을 곱씹었다. 좋아하는 공차도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하지는 못했다. 침대에 기어들어갔다.


이 날이 나는 제일 우울한 생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다음 해의 생일이 정말 인생에서 최악의 생일이었다. 10대 때 시험이 겹쳤듯이 대학교 3학년 생일에도 중간발표가 있었다. 발표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고 놀면 되니까. 그런데 그날은 침대에서 들어가 엉엉 울었다. 정말 눈물의 생일이었다. 발표에서 받은 교수와 손님들의 무반응과 어이없는 피드백이 나를 너무 서럽게 했다. 왜 나는 하필 생일에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느냐고 가상의 대상을 원망도 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같다. 가족도 있고, 정말 친한 친구들도 있으니까. 안 좋은 피드백을 받았다고 하루 종일 방에서 혼자 울 일도 없었겠지. 마찬가지로 가족과 친구들이 있으니까. 유학생이었던 과거의 나는 너무 외로워서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 상처가 아물기까지 버티는 것도, 치료하는 것도 모두 혼자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유학하면서 맞이한 생일에는 꼭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자신에게 미역국을 끓여주는 것이었다. 집에서도 안 해주는 생일 미역국을 부엌도 없는 뉴욕 기숙사에서 매년 챙겨 먹었다. 스스로 건네는 작은 위로였다.


타국 생활 중 축하받고 싶은 날 아무도 없어 외롭다면 나만의 미역국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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