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을 구출한 영웅
유학하면서 친구를 많이 사귄 것도 아니고 인생 친구를 만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초반에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한테 상처도 받았다. 그럼에도 뉴욕도 사람 사는 곳이기에 기억에 남는 인연이 있다. 그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들을 평생 기억할 것이다. 잠깐 스쳐갔지만 나에게는 오래 간직할 따듯한 마음을 남겨주었다.
처음으로 정말 큰 도움을 준 분은 지하철 승강장에서 만났다. 겨울방학 마지막 날, 나는 캐리어 하나를 끌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하필 그 전날 뉴욕 지하철에서 아시아 여성을 철로로 밀치는 묻지 마 범죄가 보도된 터라 잔뜩 긴장한 채였다. 너무 나 자신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내 몸은 지켰는데 대신 내 폰이 철로로 추락해 버렸다...
학교 근처 역까지 두 정거장 남기고 환승하려는 그 순간. 나는 유선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고 폰은 주머니 안에 있었다. 정차한 열차에 오르며 폰을 꺼냈는데 승강장과 열차 사이로 쏙 빠지고 내 귀에는 이어폰만 남았다. 열차 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이 “Oh my…”하며 나를 보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열차는 그 사람의 한 마디를 끝으로 냉정하게 문을 닫고 떠났다. Watch your step이 아니라 Watch your phone…
그것의 꼬리가 내 앞을 지나가기까지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시야에 컴컴한 철로만 남자 곧바로 계단을 뛰어올라가 직원을 찾았다. 다행히 그 역에는 직원이 부스 안에 있었고 바로 상황을 알렸다. 직원은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폰이 떨어진 위치와 기종을 온 지하철역에 방송했다. 그랬더니 옆에 서계시던 아주머니가 직원을 질타했다. 그렇게 온 동네에 광고를 하면 누가 집어갈 텐데 뭐 하는 거냐고. (뉴욕 지하철에는 스크린도어도 없고 철로가 깊지 않아 충분히 가능하다.) 이후 나에게 어디서 왔냐,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냐 물어보시는 정 많은 분이었다. 정신이 털려 정확히 어느 승강장에 서 있었는지도 기억 못 하는 내 손을 잡고 같이 폰을 찾으러 다녀주셨다. (뉴욕 지하철은 한 철로에 여러 노선이 지나며 4차 철로까지 있다.)
우리는 오르락내리락하다 다행히 아직 무사히(?) 엎어져 있는 녀석을 찾았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직원이 와서 주워주기까지는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며 자신이 밑으로 내려가 주워오겠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아니, 아주머니 그 무슨 위험한 발상이세요?! 도와주시는 것은 정말 고맙지만 그랬다가 사고라도 날까 봐 나는 극구 만류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안전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며 오히려 나를 안심시키셨고 정말 폰을 구출하셨다… 그리고 반대편 열차를 타고 쿨하게 떠나셨다. 그렇게 폰은 안전히 내 품에 돌아왔고 안전히 기숙사로 돌아가 새 학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날 기숙사에 돌아와 허겁지겁 라면을 먹고 쓴 일기를 다시 꺼내봤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난 정말 복 많은 사람이구나. 그래서 열심히 살고 배려하고 도우며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내 유학은 항상 이 패턴의 반복이었다. 너무 힘들어 다 포기하고 싶을 때, 꼭 이렇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사람이 한 명씩 나타난다. 내가 유신론자였다면 정말 믿었을 것이다. 절벽에 떨어지기 직전 내 손을 잡아준 구원자를 보내셨다고. 신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주신다고. 그러니 이겨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