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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숙사 방에 사는 그(것)들

가끔은 시력도 연기할 필요가 있다.

by 남선우

나는 밥도 거의 혼자 먹고 과제도 혼자 하는 아웃사이더였지만 AZ같은 스위트메이트 말고 룸메이트들은 많았다. 추정하건대 그들은 모두 가족일 것이다. 그들의 “바”씨 가문이었다. (미국에서는 C.)

나는 그들의 외모를 좋아하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무서워했다는 게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외모보다도 더 싫었던 것은 너무나도 조용한 그들의 인사였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아마 나는 모르는 그 방에 은신처를 따로 두었던 모양이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인지 주기적으로 인사를 하러 나오고는 했는데 너무 살며시 다가와 마주치면 정말 화들짝 놀란다. 언제는 불을 켜기 전에 밟을 뻔도 했다. 아무 소리 없이 몸이 뒤집힌 채 자신들의 생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렇게 조용한 바씨들도 소리를 내면서 다가올 때가 있었다. 겨울 방학 중이라 정신은 깼지만 몸과 눈은 일어나지 않은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었던 하루였다. 그러다 정말 느닷없이 왼쪽 귀 바로 옆에서 비행하는 큰 친구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우어어억”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상한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잠자는 대학생의 코털을 건드린 그놈을 찾았다. 없었다. 어디에도. 이게 헛것일 리가 없는데...? 기운은 느껴지는데 보이지 않아서 더 무서웠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나는 쿨하게 드라마를 봤다. 보이지 않는 것에 내 시간과 에너지를 쓰기는 싫었다. 그렇게 영영 사라지거나 다시 나오거나 둘 중 하나겠지 하면서. 그렇게 내 할 일 하다가 침대 옆 선반을 무심결에 봤는데 바씨 친구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손을 흔드는 게 아닌가. 아하하. 또 너였구나.


그날 나는 뉴저지 삼촌댁에 이주동안 머물기 위해 기차를 타는 날이었다. 몇 시간만 참으면 되는데 굳이 사투를 벌이고 뒤처리까지 하면서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버텼다. 선반 뒤에 계속 숨어있기를 바라면서.

몇 시간만 참자 우리. 이주 뒤에 오면 너도 어차피 이 방을 떠났을 테니.


이런 나의 여유로움(?)을 알면 경악하는 친구들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왜 바로 안 죽이냐고 묻는 친구도 있었다. 나름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앞에서 말했듯 힘 빼기도 싫고 귀찮다. 어차피 이 낡은 기숙사에서 나 혼자 박멸은 불가능하다. 내가 드물게 나설 때는 계속 눈앞에서 알짱거리거나 방해하며 도를 넘을 때뿐이다. 둘째로, 많이 징그러워하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벌레에 무덤덤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어렸을 적 여러 주택과 휴양림의 경험으로 벌레에 비교적 익숙한 편이다. 아직 흠칫 흠칫 놀라기는 하지만. 마지막으로, 과학 교양수업에서 우리는 이미 수많은 생물들과 동거 중이라고 배웠다. 즉, 바씨를 제외하고도 우리가 모르는 벌레들은 집 어딘가에 득실득실할 것이며 벌레가 다가 아닐 수도 있다. 일일이 신경 쓰면 못 산다...


그렇게 나는 약 3년 동안 바퀴들과 살았다(?) 우리 눈이 김치에 있는 균들을 보지 못하는 덕에 김치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시력을 연기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살다가 마주하기 싫은데 자꾸 나타난다면 그것이 벌레이든 고난이든 적당히 실눈을 뜨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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