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놈의 정신력!

정신치료약을 먹기로 했다.

by 남선우

정신력으로 어찌어찌 3학년 봄학기를 버텼지만, 학기말에 결국 나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학기를 마칠 수 없을 것 같았다. 극심한 안구통증, 그에 따르는 두려움, 과제와 성적에 대한 죄책감과 불안감에 거의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정신적으로 힘든 적은 이미 자주 겪어봤기에 어렸을 때처럼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름 우울감을 이겨낼 나만의 방법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때는 그 방법이 큰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먼저 온라인검사를 받았다. 인간관계 스트레스가 상당하고 몸과 마음이 많이 소진된 상태라는 결과가 나왔다. 사람과 부딪칠 일이 거의 없었는데 무슨 인간관계가 힘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번아웃이 온 것은 스스로 느꼈다. 힘을 다 썼으면 충전을 해야 하는데, 학기말이라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것이 너무 서럽고 힘들었다. 나으려면 쉬어야 하는데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니...


감정의 멱살을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워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과제의 족쇄에 나를 밀어 넣는 느낌이었다. 약을 복용하고 싶다고 펑펑 울었던 다음 날 바로 화장실도 못 가면서 열두 시간을 앉아 작업하는 내 상황이 정말 너무 버거웠다. 감정을 추스르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오히려 진이 빠졌다.


그래서 비대면으로 상담을 받았다. 약을 받기 위해서였다. 우울증 진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우울감이 조금 있으니 끌어올려줄 정도의 약을 처방받았다. 연말이라 배송이 늦어질 수 있다고 했는데, 정말 하루빨리 약을 먹고 싶었다.


약 자체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상담은 수술처럼 단 번에 치료하는 것이 아니기에 바로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 학기는 그저 버티는 것뿐이었다. 약과 상담에 더해 즉문즉설도 많이 보았다. 수행까지는 아니더라도 내려놓는 법을 배우고자 했다. 이런 노력들 덕분에 다음 학기부터는 더 편한 마음으로 다닐 수 있었다.


약을 먹은 경험은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지만 좋은 경험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때 정신적으로 매우 성장했다. 유학해서 얻은 결실 중 졸업장 보다도 더 가치 있게 여긴다. 그래서 정신적 고통은 정말 괴롭지만 너무 심해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라면 한 번은 겪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 시기를 지나고 나면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으니까.


그래도 정신력을 고집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자부한다. 전문가와의 상담이든, 약 복용이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능력이다.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둘러보면 생각보다 주변에 도움받을 곳이 많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고, 그래서 사회적 지능이 매우 높은 것이 아닐까. 혼자 힘으로 버티려고만 하지 말고 주저 않고 도움을 청하기를 응원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인생 자퇴는 안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