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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지하철에서 맞아본 사람, 나야

뉴욕에서 아시안 여자로 지낸다는 것

by 남선우


내가 유학 준비를 시작한 바로 다음 달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이 무슨 절묘한 타이밍이란 말인가. 미국 곳곳에서 아시안 혐오 범죄가 발생했다. 그때는 아직 미국 동부 행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섞여 사는 메가시티 뉴욕에서 아시안 혐오 현상은 더 빈번히 일어났다. 이런 현상이 팬데믹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미 살기 팍팍했는데 그저 좋은 핑곗거리였겠지.


생전 뉴욕에 가본 적도 없고 겁과 걱정도 많은 나는 처음 뉴욕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길거리에 돌아다닐 때 가방을 뒤로 매지 못했다. 혹시 강도짓을 당할까 봐. 의외로 뉴욕은 유럽처럼 소매치기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날치기 같은 경범죄가 아니라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는 중범죄에 내가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뉴욕에서 지낸 지 약 5개월이 지난 후였다. 겨울방학 마지막 날, 뉴욕 지하철에서 아시안 여성이 철로로 밀쳐져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필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 날이었다. 다음 날 잔뜩 긴장한 나는 천만 다행히도(?) 지하철 철로에 내 몸뚱아리 대신 내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몇 달 후 대선이 있었다. 재외국민투표를 위해해 한국 영사관으로 향하던 지하철 의자에 앉아있었는데데 갑자기 전차가 멈추었다. 뉴욕 지하철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라 잠시 기다리면 다시 출발하겠거니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지 만 만 ‘뉴욕이 또 뉴욕 하네.’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사람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승객들 모두가 지하철 안에서 내렸고 나도 따라 내려 지상으로 나가기 위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무서운 광경을 보았다. 승강장 위에 있는 새빨간 피웅덩이와 옆에 쓸쓸히 있는 검정 모자를... 정확한 사건 경위는 모른다. 하지만 무서움이라는 단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메스껍기도 하고 공포스럽기도 한 경험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폭력을 직접 겪지 않았기에 금방 잊고 잘 살아갔다. 고백하자면 겁도 없이 혼자서 여기저기 잘 다녔다. 택시는 너무 비쌌기에 늘 대중교통만 이용했고 관광지를 벗어난 조금 한적한 곳에서도 뚜벅뚜벅 당당히 다녔다. 그러던 중, 졸업까지 한 학기밖에 남지 않은 어느 겨울날이었다. 오랜만에 동기 한 명과 외출하기 위해 학교 근처 다운타운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마지막 계단을 밟는 순간, 눈을 희번덕 뜨며 마주 오던 한 사람이 가방으로 내 얼굴을 가격했다. 다행히 잽싸게 얼굴을 돌려 정면으로 맞지는 않았다. 아팠는지 안 아팠는지 느끼지도 못했고 기억도 안 난다. 그저 저 사람 옷에서 칼이나 총이 나오지만 말아달라고 빌 뿐이었다. 나에게 “네가 내 지갑을 훔쳤어!”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시안 여자 둘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정말 운이 좋게도 뒤에서 내려오던 백인 남성이 그 사람을 붙들었다. 나는 덜덜 떨다가 개찰구를 넘어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 미친 사람이 승강장에서까지 소리 지르며 나를 졸졸 따라왔다. 그 남성분도 따라오면서 보호해 주었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럼에도 너무 무서워서 우리는 도망쳐 다시 올라갔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야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언제는 스위트메이트 AZ가 살기 위해 줄행랑을 친 적도 있다. 나는 동행하지 않았지만 외출한 그에게 달려오는 여러 사람들이 어떤 미친놈이 칼을 들고 뛰어오고 있다며 외쳤다고 한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살기 위해 뛸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학교 근처에서 총기 사건도 있었다. 뉴욕 전체로 보면 총기 사건과 혐오 범죄가 한두 번이 아닌 것은 당연하고.


여기서 전부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이 외에도 혹시나 철로로 누가 나를 밀치지는 않을까, 심기를 건드렸다며 총이나 칼을 겨누지는 않을까, 묻지 마 폭행을 하지는 않을까 가슴 졸이며 기둥과 난간을 붙잡고 걸음을 재촉하던 날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러니 내가 뉴욕에서 살고 싶지가 않지… 그렇게 한번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나니 신기하게도 전에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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