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대 시절의 원수, 입시
유치원생 때 나는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리기랑 만들기가 좋았는데 이런 활동들과 관련된 직업을 당시에는 화가밖에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 건축이라는 학문을 알게 되고 나서는 오랫동안 건축가를 꿈꿨다.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에 빠져 애니메이터가 되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항상 무언가를 그리거나 만들거나 쓰는 일을 좋아했다.
그러나 많은 한국 학생들이 그랬듯이 중학교를 올라가면서 예체능보다는 학교 공부에 집중해야 했다. 다행히도 부모님들이 예체능을 반대하셔서는 아니었고, 공평한 평가와 기본 실력 함양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천편일률 스타일에 미술 인재들을 가두는 한국 입시 미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교양과 공부를 중요시하는 집안 분위기 때문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창작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는지 어떻게든, 낙서라도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소설과 일기도 쓰고 조물조물 무엇인가를 만들기도 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교 공부와 입시 공부에 지쳐서 할애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마음 한편에는 ‘언젠간 창작을 하리라.’는 욕망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부모님의 바람대로(?) 고학년이 되면서 창작의 기반이 되는 사람에 대한 학문, 인문학에 흥미를 느꼈다. 그렇게 화가와 건축가를 꿈꾸던 예술인 지망생은 “문송합니다. (문과생이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 인문학도가 되리라 다짐하게 된다.
뒤늦게 나름의 목표가 생겼다 하더라도, 나는 최소 6년 간의 입시 준비와 그에 따르는 현실에 너무 지쳐갔고,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다. 자신감 바닥에 자책과 우울로 인지와 감각 능력이 마비되었던 것 같다.즐겁거나 보람되는 일은 없고 그저 살아 있으니 사는 기분이었다.
재수생 시절, 하루는 이런 꿈도 꾸었다. 나를 꽤 예뻐하셨던 논술 선생님이 계셨는데 나를 엄청 혼내셨다. 이유는 내가 감히 입시생 주제에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꿈이 너무 실제 같았는지 자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잠깐 쉬면서 그림 좀 그렸다고 이런 꿈을 꾸는 내가, 이 상황이 정말 싫었다. 중학교 때부터 쌓아온 우울감과 패배감을 견디지 못 해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학교 공부를 못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입시는 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노력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는 건 공부밖에 없다는 믿음 때문에 자신감은 곤두박질쳤다. 나는 기본 의지조차도 없는 한심한 사람 같아서. 많이들 공감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입시 실패가 사회에서 추방당하고 인생 종말을 선고받는 느낌이었다.
마치 한국 대학들이, 이 사회가, 이 나라가 나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수능을 본 후 나는 미술유학을 하기로 한다. 엄청난 결심으로 시작했던 건 아니었다. 한국 대학들이 나를 거부하다 떠밀려 마지막 미술이라는 외섬에 이른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남은 건 너밖에 없다는 마음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한국 사회에 발들이기 위한 첫 관문도 통과하지 못 한 실패자고 더 노력하기 싫어서 부모님에 기대 도피하는 비겁자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 미술유학은 시작되었다. 출발부터 조금은 힘이 빠진 채로...
꿈 가득한 유학은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혹시 필자처럼 어떤 큰 목표와 다짐 없이 유학을 해도 되나 걱정된다면, 괜찮다. 장기전은 끝까지 가봐야 안다. 시작이 미미하다고 끝이 창대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