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좋은 날이 있었다. 겨울이 막 시작될 무렵, 공기가 차갑고 건조해지는 그런 날.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빨리 실내로 들어가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천천히 걷고 싶어진다. 이 바람 속에 조금 더 머물고 싶어진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특별히 갈 곳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걷고 싶어서. 찬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따갑다. 하지만 그 따가움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며칠간 흐릿했던 머릿속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느낌.
여름엔 사람들로 붐비던 산책로가 텅 비어 있다. 가끔 조깅하는 사람 한둘,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 그게 전부다. 나는 벤치에 앉는다. 차가운 바람이 계속 분다. 강물도 차가워 보인다. 하지만 앉아 있고 싶다.
찬바람이 좋은 이유를 생각해본다. 아마도 그 바람이 솔직하기 때문일 것이다. 차가운 건 차갑다고 말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한다. 거짓이 없다. 봄바람처럼 달콤한 척하지도 않고, 여름바람처럼 나른한 척하지도 않는다. 그냥 차갑다. 그게 좋다.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코끝이 시리다. 귀가 얼얼하다.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살아 있다는 느낌. 몸이 추위에 반응하고, 피부가 긴장하고, 근육이 움츠러든다. 이 모든 감각이 생생하다. 여름의 나른함 속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들.
강 건너편을 본다. 나무들이 앙상하다. 잎이 다 떨어졌다. 누군가는 저 풍경을 쓸쓸하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나무의 본래 모습. 여름 내내 무성한 잎으로 가려져 있던 가지들의 진짜 형태. 찬바람은 그걸 보여준다. 불필요한 것들을 다 벗겨내고 본질만 남긴다.
사람이 지나간다. 목도리를 목까지 올리고 빠르게 걷는다. 추운가 보다. 나도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이 바람을 조금만 더 맞고 싶다.
찬바람이 좋은 날은 혼자 있고 싶은 날과 겹친다. 따뜻한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좋겠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다. 오늘은 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바람을 느끼고 싶다.
휴대폰이 울린다. 누군가의 메시지. 확인하지 않는다. 나중에 봐도 된다. 지금은 이 순간이 더 중요하다. 찬바람, 빈 벤치, 텅 빈 산책로. 이 모든 게 완벽하다. 아무것도 더하고 싶지 않다.
한참을 앉아 있다가 일어선다. 손이 시리다. 발도 시리다. 하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이상한 일이다. 몸은 차가운데 마음이 따뜻하다니. 아마도 이게 찬바람의 마법인가 보다.
집으로 걸어간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는다. 찬바람을 조금 더 맞으며 걷는다. 사람들과 스쳐 지나간다. 모두들 추워 보인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 오늘은 찬바람이 좋은 날이니까.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간다. 따뜻한 공기가 반긴다. 옷을 벗고 손을 녹인다. 창밖으로 찬바람이 여전히 분다. 나무들이 흔들린다. 나는 창가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본다.
찬바람이 좋은 날. 일 년에 그런 날이 몇 번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내일도 그럴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괜찮다. 오늘 하루로 충분하다. 이 차가운 바람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런 날이 오면, 나는 또 나갈 것이다. 벤치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바람을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