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기억이 우리를 소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스물여섯 살이었을 때, 어느 늦가을 오후에 작은 재즈 바에서 빌 에반스의 'Waltz for Debby'를 들었다. 그때 마시던 커피는 적당히 쓰면서도 부드러웠고, 창밖으로는 은행나무 잎이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별것 아닌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 지금까지, 삼십 년이 넘도록 내 안에 남아 있다. 왜일까?
반면에 분명히 중요했을 순간들, 예를 들어 대학 졸업식 같은 것은 희미하게 흐려져서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은 중요도순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고양이처럼 제멋대로다. 우리가 불러도 오지 않고, 부르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난다.
어쩌면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조각들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간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뵀을 때 하신 말씀이 있다.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하셨다. 한 번은 육체가 죽을 때, 그리고 또 한 번은 그 사람을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사라질 때. 그 말을 듣고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되새기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어떤 순간을 살아 있게 하는 일이다. 기억은 일종의 책임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기억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어떤 기억들은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우리를 베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기억조차도 우리를 만든다. 우리는 상처로부터도 배우고, 고통으로부터도 성장한다. 완벽하게 행복한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인생이 과연 온전한 인생일까?
가끔 나는 생각한다. 만약 우리에게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과연 '우리'일 수 있을까?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평생의 기억이란 결국 평생의 삶 그 자체다. 우리는 기억 속에서 살고, 기억과 함께 늙어간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어간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자.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는 '평생의 기억'이 될 테니까. 당신이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의 온도, 창밖의 풍경,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순간까지도. 모든 것이 기억이 되고, 기억은 곧 당신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