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재즈를 듣지 않게 되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예전에는 매일 듣던 음악을, 이제는 한 달에 한 번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스물 대부터 삼십 대 초반까지, 나는 재즈에 빠져 있었다.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홍대 근처의 작은 재즈 바에 갔다. 존 콜트레인을, 마일스 데이비스를, 빌 에반스를 들으며 위스키를 마셨다. 그것이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나를 정의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재즈 앨범들은 선반 한쪽에 먼지를 쌓아가고 있다.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좋다. 하지만 예전처럼 간절하지 않다. 예전처럼 필요하지 않다. 그것이 더 슬프다.
좋아하는 것을 잃어간다는 것은 이별과 비슷하다. 갑작스럽지 않다. 서서히, 조용히 일어난다. 어느 날 문득 그 사람에게 전화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어느 날 문득 그 음악이 더 이상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내 친구 S는 한때 열정적인 사진작가였다. 어디를 가든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이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삼십오 살이 되자, 그는 카메라를 팔아버렸다. "왜?" 내가 묻자 그가 말했다.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아서. 예전엔 찍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는데, 이제는 찍지 않아도 괜찮더라."
그의 목소리에는 후회가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텅 빈 듯한 느낌이 있었다. 마치 자신의 일부를 어딘가에 두고 온 사람처럼.
우리는 변한다. 당연한 일이다. 스무 살의 나와 마흔 살의 내가 같을 수는 없다. 좋아하는 것도 변한다. 필요한 것도 변한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좋아하는 것을 잃는다는 것은, 과거의 자신을 잃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가끔 나는 생각한다. 만약 스물다섯 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너는 재즈를 사랑했잖아. 그게 너였잖아."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좋아하는 것을 잃어가는 것도 성장의 일부라는 것을.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 놓아야 한다. 모든 것을 계속 좋아할 수는 없다. 마음의 공간도 한정되어 있으니까.
어쩌면 중요한 것은 좋아하던 것을 계속 좋아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재즈를 덜 듣게 된 대신, 나는 요즘 산책을 좋아한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시간. 예전에는 지루하다고 생각했을 일.
그래도 가끔은, 정말 가끔은, 예전에 사랑했던 것들이 그립다. 그 열정이, 그 간절함이 그립다. 무언가를 미친 듯이 좋아할 수 있었던 스무 살의 나 자신이 그립다.
어젯밤, 오랜만에 빌 에반스를 들었다. 'Waltz for Debby'. 예전만큼 감동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예전처럼 매일 보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 생각나는 친구.
좋아하는 것을 잃어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나뭇잎이 떨어지듯이. 계절이 바뀌듯이. 우리는 무언가를 놓아주고, 무언가를 새로 잡는다.
그리고 언젠가, 훨씬 나이가 들었을 때, 나는 지금의 내가 사랑하는 것들도 놓아주게 될 것이다. 그것도 괜찮다. 그때의 나는 또 다른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을 테니까.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것을 잃지 않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