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때, 나는 친구의 권유로 도자기 원데이 클래스에 참가했다. 토요일 오후, 한적한 골목 안쪽의 작은 공방이었다. 선생님은 오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앞치마에 흙이 묻은 과묵한 분이었다. 그는 말이 별로 없었지만, 손놀림만큼은 정확했다.
체험이 끝날 무렵, 나는 물레를 돌리다가 실수로 찻잔 옆면에 깊은 흠집을 냈다. 순간 당황했다. 선생님이 다가와 내 손을 멈추게 했다. 그는 그 흠집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괜찮습니다. 금이 간 곳에 금을 채워 넣는 기법이 있습니다. 금계(金繼)라고 하지요. 일본에서는 킨츠기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게 하나요?" 내가 물었다.
"상처가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날 밤 나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상처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금으로 메우는 것. 상처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더 빛나게 만드는 것.
젊었을 때 나는 상처 받지 않으려고 애썼다. 벽을 쌓았다.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너무 좋아하지 않으려 했고, 너무 기대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면 덜 아플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상처 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살아있지 않은 것과 같았다.
친구 중 하나가 말했다. "너는 도자기 같아.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깨질 것 같은." 나는 웃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 말이 맞았다. 나는 깨지는 것이 두려웠다. 금이 가는 것이,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서 유리 케이스 안에 스스로를 가둬놓았던 것이다.
마흔이 되어서야 나는 깨달았다. 상처 받지 않을 방법은 없다. 살아있는 한, 사랑하는 한,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는 한, 우리는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상처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어떻게 대하느냐였다.
어느 비 오는 오후, 나는 오래된 헌책방에 들렀다. 먼지 냄새와 종이 냄새가 뒤섞인 그곳에서 한 권의 낡은 시집을 발견했다. 페이지가 찢어지고 표지가 해어졌지만, 그 안에는 누군가의 메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책은 새 책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누군가의 삶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렇다. 상처 하나 없는 사람은 아무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다. 상처는 우리가 살아온 증거다. 우리가 용기를 냈던 순간들, 사랑했던 순간들, 무너졌지만 다시 일어섰던 순간들의 흔적이다.
이제 나는 상처 받지 않으려 애쓰지 않는다. 대신 상처를 잘 돌보려고 노력한다. 상처가 생기면 들여다본다. 왜 아픈지, 무엇이 나를 아프게 했는지. 그리고 천천히 치유한다. 서두르지 않는다. 상처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가끔 옛 상처가 쑤실 때가 있다. 비 오는 날이나 외로운 밤에. 하지만 그것마저도 나쁘지 않다. 그 통증은 내가 한때 무언가를 깊이 사랑했다는 증거니까.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플 일도 없었을 테니까.
공방을 나오면서 선생님이 말했다. "완성되면 연락드릴게요. 2주 정도 걸립니다." 그는 내 실수한 찻잔을 조심스럽게 선반에 올려놓았다. "좋은 작품이 될 겁니다."
상처 받지 않을 방법은 없다. 하지만 상처를 금으로 메울 수는 있다. 그 금은 시간일 수도 있고, 이해일 수도 있고, 용서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상처가 우리를 부서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 온전하게 만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지금 내 책상 위에는 그때 만들었던 그 찻잔이 있다. 흠집을 메운 금빛 선이 옆면을 가로지른다. 나는 매일 아침 그 잔으로 차를 마신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도 저 찻잔처럼, 금이 가고 또 메워지면서, 점점 더 나답게 되어가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