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어른

by 생각의정원

어느 목요일 저녁이었다. 회사에서 실수를 했다. 큰 실수는 아니었다. 보고서에 숫자를 잘못 적었고, 팀장이 발견했고, 고쳤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여섯시에 퇴근했다. 지하철을 탔다. 창밖을 봤지만 풍경은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오후 세시의 장면이 반복됐다. 회의실, 팀장이 보고서를 넘기는 소리, "이 숫자 틀렸네요". 나는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팀장은 한숨을 쉬었다. "확인 좀 제대로 하세요." 동료들이 나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시선이 느껴졌다.


지하철역에서 내렸다. 편의점에 들렀다. 삼각김밥 코너 앞에 섰다. 참치, 김치, 불고기. 뭘 먹을지 결정이 안 됐다. 머릿속에서 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확인 좀 제대로 하세요." 손을 뻗어 아무거나 집었다. 뭘 집었는지도 몰랐다.


계산을 하고 집으로 걸어갔다. 현관문을 열었다. 불을 켰다. 가방을 내려놓았다. 샤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몸에 닿았다. 그런데 머릿속은 멈추지 않았다. 회의실, 보고서, 틀린 숫자, 팀장의 표정. 같은 장면이 돌고 돌았다. 왜 확인하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 급하게 제출했을까. 조금만 더 신경 썼으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거울을 봤다. 피곤한 얼굴이 보였다.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을 들었다. SNS를 열었다. 대학 동기들의 게시물이 보였다. 누군가는 승진했고, 누군가는 프로젝트를 성공시켰고, 누군가는 상을 받았다.


나는 뭘 하고 있는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천장을 봤다. 문득 생각했다. 누군가 나에게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주면 좋겠다고.

부모님은 항상 걱정하셨다. "힘들지 않니", "밥은 먹고 다니니", "너무 무리하지 마". 사랑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위로가 아니라 확신이 필요했다.


친구들은 "괜찮아"라고 했다. "별거 아니야", "다들 그래",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고마웠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괜찮다'가 아니라 '잘하고 있다'를 듣고 싶었다.


회사에서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잘했을 때는 침묵이었고, 못했을 때는 지적이었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는 그런 곳이니까.


하지만 가끔은 궁금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이 길이 맞는 건지. 이 속도가 괜찮은 건지.


대학교 4학년 때 지도교수님이 계셨다. 졸업 논문을 쓸 때였다. 한 달에 한 번씩 연구실을 찾아갔다.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조언을 들었다.


어느 날,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잘하고 있어요." 나는 멈췄다. "네?" "잘하고 있다니까요. 이 속도면 충분해요."


그날 밤, 이상하게 잠이 잘 왔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


졸업하고 나서 그런 사람은 없었다.


부모님은 내 일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셨다. 친구들은 각자의 삶으로 바빴다. 회사 사람들은 동료였지, 조언자가 아니었다.


나는 혼자 판단해야 했다. 이게 맞는지, 저게 틀렸는지. 빨라야 하는지, 천천히 가도 되는지. 모든 선택, 모든 순간.


피곤했다.


금요일 아침이었다.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를 샀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앞 사람이 돌아봤다. 사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혹시 다음 주 프레젠테이션 준비하시는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놀랐다. "네, 어떻게 아셨어요?" "아, 저도 같은 건물에서 일해요. 엘리베이터에서 본 적 있어요."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도 웃었다. "긴장되시죠?" "네, 많이요." "당연해요. 저도 그랬어요."


커피를 받았다. 그녀도 받았다. 함께 밖으로 나왔다. 방향이 같았다. 나란히 걸었다.


"처음엔 다들 긴장해요. 근데 괜찮아요. 준비한 거 믿고 하시면 돼요." 그녀가 말했다. "전 계속 실수할 것 같아요." "실수해도 돼요. 누구나 해요. 중요한 건 계속하는 거예요."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녀는 11층에서 내렸다. "화이팅!" 문이 닫혔다.


짧은 대화였다. 3분도 안 됐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나는 12층에서 내렸다. 사무실로 들어갔다. 컴퓨터를 켰다.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열었다. 다시 확인했다.

점심시간에 혼자 밥을 먹었다. 회사 식당 구석 자리. 창밖을 봤다.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각자의 점심시간.

모두 비슷할 것이다. 불안하고, 걱정하고,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누군가 말해주길 바라고. "잘하고 있어", "괜찮아", "이대로 가".


하지만 그런 어른은 없었다. 아니, 있을 수 없었다. 모두가 자기 삶으로 바빴으니까.

결국은 스스로 말해줘야 하는 것 같았다. 나 자신에게. "오늘도 출근했어", "실수했지만 고쳤어", "내일도 해볼 거야".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모르는 게 있어도 괜찮다고.


그게 어른이 되는 거구나. 생각했다. 누군가 말해주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말해주는 것.


물론 가끔은 그리울 것이다. 지도교수님 같은 사람.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알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그 여자 같은 사람.


하지만 그런 순간은 우연이었다. 기다릴 수는 없었다.


저녁이 됐다. 퇴근했다. 지하철을 탔다. 어제와 같은 자리에 섰다. 어제와 같은 풍경이 지나갔다.

하지만 조금 달랐다. 어제보다 조금 가벼웠다.


집에 도착했다. 샤워를 했다.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을 들지 않았다. 그냥 천장을 봤다.

혼잣말을 했다. "오늘도 잘했어."


작은 목소리였다. 확신에 찬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내일도 말해줄 것이다. 모레도. 그 다음날도. 언젠가는 익숙해질 것이다.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것.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에게,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에게. "잘하고 있어요", "괜찮아요", "계속하세요".


그런 어른이 되는 것.

눈을 감았다. 잠이 왔다.


아침이 되면 알람이 울릴 것이다. 일어날 것이다. 또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말할 것이다. 나 자신에게.


"오늘도 잘할 거야."

그렇게 우리는 자란다.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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