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는 곳

by 생각의정원

도시의 바람은 건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서울, 여의도 거리. 오후 세시. 바람이 불었다. 강했다. 순간적으로. 서류를 든 손을 움켜쥐어야 했다. 날아갈 것 같았다.


이상한 바람이었다.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왼쪽에서 불다가 갑자기 오른쪽에서 불었다.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바람. 자연스럽지 않았다. 인공적이었다.


차가웠다. 11월의 바람. 하지만 상쾌하지는 않았다. 매캐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자동차 배기가스, 아스팔트, 사람들. 도시의 냄새.


횡단보도를 건넜다. 바람이 신호등을 흔들었다. 삐걱거렸다. 사람들이 재킷 깃을 세웠다.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모두 빨리 걸었다. 바람을 피해서.


이게 도시의 바람이었다. 피하고 싶은 바람. 방해가 되는 바람. 서류를 날리고, 머리를 헝클고, 눈을 따갑게 하는.


사무실로 돌아가 창문을 통해 바람을 봤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보였다. 나무가 흔들렸다. 가로등이 흔들렸다. 사람들의 옷이 펄럭였다. 하지만 느껴지지 않았다. 유리 너머의 바람. 에어컨이 돌아가는 사무실 안에서.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 두 달 전, 부산의 바람.


해운대 바닷가였다. 오전 열시쯤. 바람이 불었다. 바다에서. 얼굴을 스쳤다. 차가웠던 도시의 바람과 달리 선선했다. 촉촉했다.


소금 냄새가 났다. 바다 냄새. 깨끗했다. 순수했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도시의 매캐한 냄새와는 완전히 달랐다.


파도 소리와 함께 왔다. 찰싹찰싹. 규칙적인 소리. 바람도 규칙적이었다. 한쪽에서만 불었다. 바다에서 육지로. 방향이 분명했다. 도시 건물 사이를 헤매는 바람과는 달랐다.


모래사장을 걸었다. 바람이 계속 불었다. 머리카락이 날렸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시원했다.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바다를 보며. 바람을 맞으며. 아무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람을 향해 앉아 있었다. 도시에서는 모두가 바람을 피했는데.


나도 앉았다. 모래 위에. 바람이 불었다. 눈을 감았다. 느꼈다. 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걸. 옷을 스치는 걸. 숨을 쉴 때마다 바람이 코로 들어왔다. 바다의 바람.


이게 바다의 바람이었다. 맞이하고 싶은 바람. 함께 있고 싶은 바람. 머리를 식혀주고, 마음을 가볍게 하고, 생각을 멀리 보내주는.


삼십 분쯤 앉아 있었을까. 일어났을 때 몸이 가벼웠다. 머리가 맑았다. 바람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강한 바람이 있었다. 작년 가을, 설악산에서 만난 바람.


권금성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산 위. 바람이 불었다. 강했다. 도시의 바람보다, 바다의 바람보다 더 강했다.


거칠었다. 사납기까지 했다. 몸이 흔들렸다. 난간을 잡아야 했다. 바람이 밀어냈다.


하지만 깨끗했다. 투명했다. 나무 냄새가 났다. 흙 냄새가 났다. 차가웠지만 상쾌했다. 도시의 매캐함도, 바다의 짠 냄새도 없었다. 그냥 순수한 공기.


소리가 컸다. 우우우. 나무들 사이를 지나며 내는 소리. 바위에 부딪치며 내는 소리. 웅장했다. 바다의 규칙적인 파도 소리와도 달랐다. 더 거칠고, 더 야생적이었다.


방향이 계속 바뀌었다. 하지만 도시의 바람처럼 혼란스럽지 않았다. 자연스러웠다. 산의 지형을 따라 흐르는 바람.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다. 풍경을. 하지만 바람은 찍히지 않았다. 느낄 수만 있는 것.


나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강한 바람이 온몸을 흔들었다. 멀리서 새 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실려서.


이게 산의 바람이었다. 거친 바람. 강한 바람. 하지만 살아있는 바람. 자연 그대로의 바람.


십 분쯤 서 있었을까. 추워졌다.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실내. 하지만 아쉬웠다. 바람이 그리웠다.


사무실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세 가지 바람이 있었다.


도시의 바람, 바다의 바람, 산의 바람.


도시의 바람은 피하고 싶었다. 방해가 됐다. 거슬렸다. 하지만 매일 맞았다. 어쩔 수 없이. 지금처럼.


바다의 바람은 좋았다. 맞이하고 싶었다. 편안했다. 하지만 가끔만 만났다. 휴가 때만.


산의 바람은 강했다. 거칠었다.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살아있었다. 진짜였다.


어느 바람이 좋은가. 답은 없었다. 각자 달랐으니까. 도시의 바람은 도시에 맞았고, 바다의 바람은 바다에 맞았고, 산의 바람은 산에 맞았다.


하지만 가끔은 생각했다. 도시에 살면서 바다의 바람을 그리워하는 게 맞는 건가. 사무실에 앉아서 산의 바람을 떠올리는 게 의미가 있나.


모르겠다.

바람은 그곳에 있다는 것을. 도시에도, 바다에도, 산에도. 각자의 바람이.


그리고 언젠가 다시 갈 것이다. 바다에도, 산에도. 그곳의 바람을 맞으러.


지금은 도시의 바람을 맞으며 산다. 건물 사이의 바람. 인공적인 바람. 하지만 내가 사는 곳의 바람.

창밖을 봤다. 바람이 여전히 불고 있었다. 나무가 흔들렸다.


내일도 바람은 불 것이다. 도시에서, 바다에서, 산에서.


그렇게 세상은 움직인다. 바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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