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는 것들

by 생각의정원


이어폰을 빼는 순간, 세상이 돌아왔다.


지하철 안이었다. 출근길 오전 여덟시. 나는 항상 이어폰을 꽂고 다녔다. 음악을 들으며. 팟캐스트를 들으며. 때로는 아무것도 재생하지 않고 그냥 꽂고 있었다.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그런데 오늘은 이어폰 배터리가 나갔다. 충전하는 걸 깜빡했다.


어쩔 수 없이 빼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들렸다.


지하철이 달리는 소리. 덜컹덜컹. 레일과 바퀴가 부딪치는 소리. 낮고 규칙적인. 누군가는 시끄럽다고 할 소리였지만, 듣고 있으니 리듬이 있었다. 마치 오래된 재즈 음반의 베이스 라인 같은.


옆 사람이 기침을 했다. 작게. 누군가 가방 지퍼를 여는 소리가 났다. 찌익. 멀리서 아기가 웃었다. 어머니가 "안 돼"라고 말하는 소리.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전동차 안내방송이 나왔다. "다음 역은 시청, 을지로3가역입니다." 매일 듣던 소리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목소리의 톤이 들렸다. 약간 높은, 약간 기계적인, 하지만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역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 쉬익. 사람들이 내리는 발소리. 딱딱딱. 구두 소리, 운동화 소리, 각각 달랐다.


회사 건물에 도착했다. 로비를 지나며 분수대 소리가 들렸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 또각또각.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3년 동안 이 건물에 다녔는데 처음 듣는 소리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올라가는 소리. 윙. 숫자가 바뀔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 띵. 3층, 띵. 6층, 띵. 9층, 띵. 12층.


사무실 문을 열었다. 에어컨 소리가 들렸다. 낮게 웅웅거렸다. 키보드 소리들. 타닥타닥타닥. 리듬이 제각각이었다. 어떤 사람은 빠르게, 어떤 사람은 천천히. 프린터 소리. 위잉. 복사기 소리. 찌지지직.


내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를 켰다. 부팅음. 띠링. 마우스 클릭 소리. 딸깍. 이메일을 확인했다. 스크롤 소리는 없었지만 느껴졌다.


동료가 커피를 마셨다. 후루룩. 옆 자리에서 누군가 한숨을 쉬었다. 후. 팀장이 전화를 받았다. "네, 알겠습니다." 목소리에 피로가 묻어 있었다.


점심시간이 됐다. 식당으로 갔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뒤섞였다. 웅성웅성. 개별 단어는 들리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소음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있었다. 살아있는 공간의 소리.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쳤다. 땡그랑. 누군가 물을 마셨다. 꿀꺽. 의자가 끌렸다. 끼익.


오후가 됐다. 회의가 있었다. 회의실에 들어갔다. 에어컨 소리가 더 컸다. 회의 자료를 넘기는 소리. 바스락. 볼펜으로 메모하는 소리. 스윽스윽. 팀장이 설명했다. 중간중간 "음"이라는 소리를 냈다. 생각하고 있다는 표시.


퇴근 시간이 됐다. 사무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멀리서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 위잉. 가까워졌다. 문이 열렸다. 쉬익.


지하철을 탔다. 이번에도 이어폰 없이. 퇴근 시간의 소리는 출근 시간과 달랐다. 더 느렸다. 더 지쳐 있었다. 한숨 소리가 많았다. 하품 소리도.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었다. 딸깍. 불을 켰다. 찰칵. 냉장고 소리가 들렸다. 웅. 계속 울리고 있었구나. 평소에는 몰랐다.


창문을 열었다. 바깥 소리가 들어왔다. 차 소리, 사람들 대화 소리, 바람 소리. 섞여서 하나의 소리가 됐다. 도시의 소리.


샤워를 했다. 물 소리. 쏴아. 비누가 바닥에 떨어졌다. 툭.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바스락바스락.


소파에 앉았다. 조용했다. 정말 조용했다. 하지만 완전한 침묵은 아니었다. 냉장고 소리, 시계 초침 소리,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TV 소리. 조용한 밤에도 소리는 있었다.


이어폰을 충전기에 꽂았다. 내일은 다시 꽂고 다닐 것이다. 음악을 들으며, 팟캐스트를 들으며. 세상을 차단하며.


하지만 가끔은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부러라도. 그래야 들리는 것들이 있으니까.


커피 내리는 소리, 새 소리, 바람 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 키보드 소리, 발소리, 문 닫히는 소리. 살아있는 소리들.


우리는 너무 많은 걸 듣고 있다. 이어폰 안의 세계를. 하지만 정작 주변의 소리는 듣지 못한다. 아니, 듣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시끄러우니까. 복잡하니까. 신경 쓰이니까.


하지만 그 소리들이 세상이었다. 진짜 세상.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소리.


눈을 감고 들었다. 냉장고 소리, 시계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차 소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안심이 됐다. 혼자가 아니라는 증거 같았다.


이어폰 배터리가 나간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하루 종일 세상을 들었으니까.


내일도 가끔은 빼야겠다. 이어폰을. 그리고 들어야겠다.


세상이 내는 소리를.


그렇게 우리는 듣는다. 귀 기울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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