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혹은 우연이 쌓여 필연이 되는 방식에 대하여

by 생각의정원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자유의지와 운명 사이에서 싸워왔다. 하지만 나는 그 논쟁이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삶은 논문이 아니니까. 삶은 훨씬 더 습하고, 더 냄새가 나고, 더 우연적이다.


인연이란 무엇인가,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잠시 커피잔을 내려놓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인연이란, 수백만 개의 우연이 같은 방향으로 쓰러지는 순간이라고.


도미노를 생각해보자.


하나의 조각이 쓰러지면 다음 조각이 쓰러진다. 그 연쇄는 예측 가능하고 물리적이다. 하지만 첫 번째 조각을 세운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조각이 왜 하필 그 자리에 서 있었는가. 인연의 철학적 질문은 항상 첫 번째 조각 앞에서 멈춘다.


내가 지금의 일을 시작한 것도, 지금의 사람들을 만난 것도, 돌이켜보면 전부 ‘하마터면 일어나지 않을 뻔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날 그 미팅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 책을 집어 들지 않았더라면, 그 골목을 걸어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인생은 그런 ‘만약’들로 가득 차 있고, 인연은 그 만약들이 기적처럼 겹쳐지는 지점에서 태어난다.


한국어에는 ‘연’(緣)이라는 글자가 있다. 실 사(糸)와 인연 연(彖)이 합쳐진 글자다. 즉, 실로 연결된 것. 보이지 않는 실. 동양의 오래된 상상력은 인연을 끊어지지 않는 붉은 실로 표현했고, 나는 그 이미지가 꽤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실은 팽팽하게 당겨질 수도 있고, 느슨하게 늘어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엉켜서 매듭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실은 끊어지기 전까지는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한다. 그렇게 빨리 즉흥적으로 갈 줄 몰랐다. 누군가의 권유로, 반쯤 기대가 덜한 마음으로, 그냥 갔다. 그녀와 헤어지고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조용해졌다. 폭풍이 지나간 것도 아니고, 번개가 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딘가 맞는 것 같았다. 마치 오랫동안 찾던 단어가 문장 안에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불교에서는 인연을 ’업(業)’의 흐름으로 설명한다. 과거의 행위가 현재의 만남을 만들고, 현재의 태도가 미래의 인연을 짓는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연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능동적으로 빚어지는 것이다.


나는 이 생각이 좋다. 왜냐하면 그것은 책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어떻게 대화하고, 어떻게 약속을 지키고, 어떻게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느냐가 앞으로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모이느냐를 결정한다. 인연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 손으로 가꾸는 것이기도 하다.


8개월 된 아들이 처음으로 내 손가락을 쥐었던 날 밤을 기억한다. 그 작은 손이 내 검지를 꽉 감쌌을 때, 나는 생각했다. 이 아이는 어떤 우주적 확률로 지금 여기 있는가. 수억 개의 가능성 중에서, 이 특정한 생명이, 이 특정한 눈을 가지고, 이 특정한 시간에, 내 곁에 누워 있다는 것.


그건 우연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정밀하고, 필연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아슬아슬하다.


아마 인연이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것일 게다. 우연이 충분히 반복되면 필연처럼 보이게 되는 것. 혹은 필연이 너무 자연스럽게 찾아와 우연처럼 느껴지는 것. 그 경계 위에 우리는 서 있고, 그 경계 위에서 우리는 서로를 알아본다.


나는 오늘도 지하철을 타고, 누군가의 옆자리에 앉고, 같은 카페의 문을 밀고 들어간다. 어쩌면 그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인연이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실이 지금 막 서로를 향해 뻗어 나가고 있을지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커피를 홀짝인다. 인연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가능성을 기꺼이 믿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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