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오래된 머그컵을 꺼내 커피를 따르다가 깨달았다. 손잡이 아래에 실금이 하나 가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처음부터였는지도.
나는 그 컵을 버리지 않았다. 커피는 새지 않았고, 온기는 여전히 손바닥에 전해졌다. 금이 갔다는 사실이 컵의 본질을 바꾸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그 금을 알고 있었고, 조금 더 조심스럽게 쥐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도 그런 것이라고, 나는 요즘 생각한다.
10년 넘게 일을 해오면서 수많은 약속이 오갔다. 명함을 교환하고, 악수를 나누고, 슬랙 메시지로 ‘확인했습니다’를 주고받았다. 어떤 믿음은 단단하게 굳었고, 어떤 믿음은 어느 순간부터 조용히 금이 갔다. 드라마틱한 배신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어느 날 상대방의 말이 예전만큼 무겁게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것뿐이었다.
금은 항상 소리 없이 간다.
지진처럼 요란하게 쪼개지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작은 온도 차이가 쌓이고, 시간의 무게가 눌리고, 어떤 무심한 말 한마디가 마지막 균열을 완성하는 식이다. 그렇게 생긴 금은, 사실 그 전에 이미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보이지 않았을 뿐.
나는 가끔 그 보이지 않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분명히 무언가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는데, 나는 화면을 들여다보거나 마감을 쫓거나, 혹은 그냥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믿음의 금은 대부분 그렇게 방치된 틈에서 시작된다.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작은 외면들이 켜켜이 쌓인 결과다.
그래서 나는 요즘 조금 더 자주 고개를 든다. 화면에서 눈을 떼고, 상대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진 건 아닌지 귀를 기울인다. 그게 믿음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아내가 잠든 아이 곁에서 낮은 목소리로 자장가를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 나는 믿음이라는 게 어쩌면 완전무결한 도자기 같은 게 아니라는 걸 느낀다. 완벽한 표면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금이 간 자리를 서로 알면서도 계속 같은 온도로 손을 감싸는 것. 그게 믿음의 진짜 형태일지도 모른다.
일본에는 깨진 도자기의 금을 금(金)으로 메우는 기술이 있다. 긴쓰기(金継ぎ). 깨진 자리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금빛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상처가 있었음을 인정하되, 그것이 이 물건의 역사라고 받아들이는 태도. 어딘가 한국 사람들이 ‘우리’라는 말에 담는 감각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같아지는 게 아니라, 금 간 자리마저 함께 품는 것.
어쩌면 우리가 진짜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금이 가는 순간이 아니라, 금이 간 줄도 모르고 지나치는 무감각함인지도 모른다. 금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어떻게 할지 선택할 수 있다. 메울 수도 있고, 내려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지 못한 금은 선택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그 머그컵으로 커피를 마신다. 금 간 자리를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짚으면서. 이 컵이 언젠가 완전히 부서지는 날이 오더라도, 그것은 이 컵이 충분히 오래 쓰였다는 증거일 것이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금이 갔다는 건, 그만큼 무언가가 거기에 기댔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기댈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삶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