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을 마시는 시간

by 생각의정원

20대 초반, 일본에서 처음 제대로 된 커피를 마셨다. 삿포로의 작은 카페였다.

마스터가 필터 커피로 내려준 커피. 그때는 몰랐다. 그게 내 인생을 바꿀 줄은.


한국에 돌아와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일을 시작했다. 메뉴얼대로 샷을 추출하고, 우유를 스팀하고, 음료를 만들었다. 바빴다. 하루에 수백 잔을 만들었다. 커피를 만들었지만, 커피를 맛볼 시간은 없었다.


20대 중후반, 나는 메인 바리스타로 가게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커핑, 추출 이론, 로스팅, 원두의 특성. 배울 게 끝없이 많았다. 자격증도 땄고, 대회에도 나갔고, 외국 바리스타들과 교류도 했다. 20대는 그렇게 커피와 함께 지나갔다.


지금은 다르다. 가게도 없고, 바리스타도 아니다. 그냥 아침에 커피를 내려 마시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이 커피를 가장 잘 맛보는 것 같다.


아침 일곱 시, 나는 원두를 꺼낸다. 손으로 만져본다.

기름기가 있는지, 표면이 매끄러운지. 이건 습관이다. 20대에 몸에 밴.

로스팅된 지 얼마나 됐는지 대충 감이 온다.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는다. 분쇄 소리를 듣는다. 똑딱똑딱. 이 소리도 정보다.

너무 빠르면 굵게 갈린 거고, 느리면 곱게 간 것이다.

예전엔 정확히 재려고 타이머를 켰지만, 지금은 소리만 들어도 안다.


분쇄된 원두를 드리퍼에 담고, 향을 맡는다. 눈을 감고. 이 순간이 좋다. 아직 물을 붓기 전. 마른 원두의 향. 로스팅 정도에 따라 다르다. 얕게 볶으면 풀 냄새 같은 게 나고, 깊게 볶으면 고소한 냄새가 난다.


물을 끓인다. 92~95도. 예전엔 온도계로 정확히 쟀지만, 이제는 주전자를 보면 안다.

끓고 나서 30초쯤 기다리면 딱 맞다. 이것도 몸이 기억한다.


첫 번째 물을 붓는다. 천천히, 중앙부터. 원두가 부풀어 오른다. 블루밍. 신선한 원두일수록 많이 부푼다. 이산화탄소가 빠져나오는 것이다. 이때 올라오는 향이 제일 강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깊게 들이마신다.


30초 기다린다. 예전엔 타이머를 켰지만, 지금은 그냥 센다. 천천히. 하나, 둘, 셋. 이 시간 동안 향이 퍼진다. 부엌 전체로.


두 번째 물을 붓는다. 원을 그리며, 천천히. 물줄기가 굵으면 쓴맛이 나고, 가늘면 신맛이 난다. 오늘은 중간 정도로. 드리퍼 안에서 커피가 소용돌이친다. 갈색 거품이 생긴다. 이게 제대로 추출되고 있다는 신호다.


마지막 물을 붓는다. 이번엔 조금 빠르게. 전체적으로 고르게. 드리퍼 벽면에 붙은 원두까지 씻어내린다. 다 내리면 원두 표면이 평평해야 한다. 중앙이 움푹 들어가 있으면 물이 한쪽으로만 흘러간 것이다.


커피가 다 내려졌다. 컵을 들어 빛에 비춰본다. 투명도를 본다. 맑을수록 깨끗하게 추출된 것이다.

탁하면 미분이 많이 섞인 것이다.


첫 모금을 마시기 전에 향을 맡는다. 컵을 코에 대고. 뜨거운 김이 올라온다. 이때의 향과 아까 드라이 향은 다르다. 더 복합적이다. 과일 향 같은 것도 느껴진다. 어떤 과일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냥 새콤달콤한 뭔가.

첫 모금. 뜨겁다. 혀가 델 것 같다. 맛은 잘 안 느껴진다. 그냥 뜨겁다는 것만. 이걸 아는데 10년 걸렸다. 뜨거울 땐 맛이 안 느껴진다는 것.


30초 기다린다. 다시 한 모금. 이번엔 조금 다르다. 신맛이 먼저 온다. 혀끝에서. 그다음 단맛이 올라온다. 혀 중간쯤에서. 목으로 넘어갈 때 쓴맛이 살짝 느껴진다. 깔끔하다. 뒷맛이 개운하다.


소리를 내며 마셔본다. 후루룩. 공기와 함께. 향이 입 안에서 코로 올라간다. 레트로네이절 아로마. 전문 용어다. 입 뒤쪽에서 코로 올라가는 향. 이게 진짜 맛이다. 혀로 느끼는 것보다 코로 느끼는 게 더 많다.


또 한 모금. 이번엔 입안에서 굴려본다. 혀 위에서, 입천장에서, 볼 안쪽에서. 질감을 느낀다. 묵직한지, 가벼운지. 오늘 커피는 중간 정도다. 바디가 적당하다.


미지근해졌다. 다시 한 모금. 맛이 달라졌다. 신맛이 줄어들고 단맛이 강해졌다. 온도가 내려가면서 미각이 더 민감해진 것이다. 이제야 제대로 맛이 느껴진다.


거의 식었다. 마지막 한 모금. 차갑다. 또 다른 맛이다. 산미가 선명하다. 처음엔 못 느꼈던 맛들이 나온다. 복숭아 같기도 하고, 자두 같기도 하다. 정확한 표현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느껴진다.


컵을 내려놓는다. 입안에 남은 여운을 느낀다. 피니시. 깔끔하게 사라지는지, 아니면 계속 남는지. 오늘은 깔끔하다. 좋은 커피다.


이게 내가 커피를 맛보는 방법이다. 매일 아침, 거의 같은 방식으로. 특별한 건 없다. 20대에 배운 것들을 그냥 반복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때는 기술이었다면, 지금은 의식이다.


누군가를 위해 만들지 않는다. 점수를 받지도 않는다. 그냥 나를 위해 만들고, 천천히 마신다. 급하지 않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시간이 있다.


20대에는 커피를 공부했다. 이론을 배우고, 기술을 익히고, 정확하게 추출하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그냥 즐긴다.

배운 것들이 몸에 배어서, 생각하지 않아도 손이 움직인다.

그래서 여유가 있다.

과정을 즐길 수 있다.


커피를 맛본다는 건 결국 집중하는 것이다.

향에, 맛에, 온도에, 질감에. 몇 분 동안 오로지 커피에만 집중하는 것. 그게 전부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전문 바리스타가 아니어도 된다. 그냥 천천히 마시면 된다. 급하게 들이키지 말고. 온도 변화에 따라 맛이 어떻게 바뀌는지 느껴보면 된다. 그게 시작이다.


20년 가까이 커피를 해왔지만, 여전히 배운다. 매일 아침 내리는 커피가 매번 조금씩 다르다. 같은 원두, 같은 방법인데. 그게 재미있다. 정답이 없다는 것.


오늘 커피는 어땠나. 나쁘지 않았다. 신맛과 단맛의 균형이 좋았다. 내일은 또 어떨까. 알 수 없다. 그래서 내일 아침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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