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서점

by 생각의정원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건 오후 세시쯤이었다. 나는 회사에서 조퇴를 하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감기 기운이 있어서 일찍 들어가라는 팀장의 배려였다. 실제로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지만,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전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비는 이미 제법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아침 날씨는 맑았고,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려다가, 그냥 비를 맞고 걸어가기로 했다. 집까지는 10분 거리였다.


비를 맞으며 걷는 건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랬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른이 되면 비를 피하게 된다. 우산을 쓰고, 처마 밑으로 들어가고, 택시를 잡는다. 비에 젖으면 감기에 걸리고, 옷이 망가지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은 그냥 걷고 싶었다.


골목을 지나다가 작은 서점 하나를 발견했다. 전에도 지나쳤을 텐데 눈여겨본 적은 없었다. '책과 쉼표'라는 간판이 달려 있었다. 유리문 너머로 따뜻한 조명이 보였다. 나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종소리가 울렸다. 서점은 작았다. 10평 남짓 되어 보였다. 책장이 네 개 있었고, 안쪽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카운터 뒤에 앉아 있던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그가 말했다.

"비 좀 피하려고요." 나는 말했다.

"천천히 구경하세요."


나는 책장 사이를 걸었다. 베스트셀러는 별로 없었다. 대신 오래된 소설들, 시집들, 에세이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먼지 냄새와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좋은 냄새였다.


한 권을 꺼내 펼쳤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이었다. 대학생 때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책이었다. 첫 문장을 읽었다. "그는 케이크를 주문하러 빵집에 갔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스물두 살로 돌아가 있었다.


당시 나는 학교 도서관 3층 구석 자리에 자주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캠퍼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시험 기간이 아닐 때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카버를 읽었고, 헤밍웨이를 읽었고, 무라카미를 읽었다. 실용적인 책은 아니었다. 취업에 도움이 되는 책도 아니었다. 그냥 읽고 싶어서 읽었다.


그때는 시간이 많았다. 아니, 시간이 많다고 느꼈다. 미래는 아직 멀리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무한해 보였다. 작가가 될 수도 있고, 기자가 될 수도 있고, 교사가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 가능성들을 품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좋은 책이죠." 주인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카운터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왔다.


"카버는 특별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모든 게 일어나는 느낌이랄까."


"네." 나는 대답했다.


"요즘은 이런 책 읽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다들 바쁘고, 실용적인 걸 찾으니까."


"저도 오랜만이에요. 책 읽는 게."


"그럴 만도 하죠. 사는 게 바쁘니까."


그는 다시 카운터로 돌아갔다. 나는 책을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한 시간쯤? 아니면 더 짧았을까. 어느 순간 비가 그쳤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었지만, 빗방울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책 사 가세요?" 주인이 물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계산을 하고 서점을 나섰다. 젖은 아스팔트에서 흙 냄새가 났다. 나는 책을 가방에 넣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 나는 그 책을 다 읽었다. 오랜만에 밤새워 책을 읽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무언가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일주일 후, 나는 다시 그 서점을 찾아갔다. 주인은 나를 기억하는 것 같았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책장 사이를 걸으며 천천히 책들을 살펴봤다.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그 후로 나는 한 달에 한두 번 그 서점에 갔다. 비가 오는 날도, 맑은 날도. 항상 책을 사지는 않았다. 가끔은 그냥 둘러보고 나왔다. 하지만 그곳에 가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마치 어딘가로 돌아가는 느낌.


지금도 가끔 그 서점에 간다. 주인과는 특별히 친해지지 않았다. 그저 인사를 나누고, 날씨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고, 추천할 만한 책이 있냐고 물으면 한두 권 꺼내준다. 그 정도의 관계.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세상에는 이런 장소가 필요하다. 바쁘지 않은 곳.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 곳. 그냥 있어도 괜찮은 곳.


비가 내리면 나는 가끔 그날을 떠올린다. 우산 없이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서점. 레이먼드 카버의 첫 문장. 창밖으로 내리는 비. 천천히 흐르던 시간.


그리고 생각한다. 어쩌면 길을 잃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계획에 없던 곳으로 들어가는 것도. 비를 맞으며 걷는 것도.


그렇게 우리는 때때로 잊고 있던 것들을 다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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