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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픽 노 이블>

by 잭 슈렉

※ 소개하는 영화에 대한 결말이 언급되오니 불편하신 분은 뒤로 가기를 꾹 눌러주세요.






대부분의 공포 스릴러 영화는 극악무도한 설정과 범죄 행위 그리고 이를 죽을힘을 다해 이겨내는 주인공의 고군분투로 꾸며진다. 듣도 보도 못한 살인 방식 혹은 살인 도구가 등장하고, 평범했던 소시민이 슈퍼맨 급 능력을 발휘해 권선징악을 하는 서사는 충분히 익숙한 모습이다. 특급 살인마도 무찌르고, 사탄도 무찌른다. 그것이야말로 영화를 보는 관객이 누릴 수 있는 대리만족이었기 때문이다.


설정에서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 <겟 아웃>의 경우에도 인종차별과 유사과학 그리고 신앙심이 개입해 흑인 노예를 잡아 오는 일가족의 행태를 보여준다. 그간 실패가 없었던 그 집구석에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의 재기를 통해 종말을 끼얹는 결말은 그나마 관객에게 희망과 차분함을 안겨준다.


<스픽 노 이블>이란 영화가 있다. 자동차로 얼마든지 국경을 넘나들며 여행할 수 있는 유럽을 배경으로 단란한 어느 가족이 여행지에서 만난 다른 가족의 집에 초대받는 영화다. 짐작은 했지만 짐작 이상이었고, 희망을 기대했지만 그딴 거 다 필요 없다. 2022년 작품으로 2년 뒤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를 만들었으나 스틸컷만 봐도 본작에 비해 별로일 것 같다. 아주 나중에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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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픽 노 이블>이 주는 공포는 기존의 공포와 흡사 다르다. 단순한 공포심 두려움 무서움만을 연달아 선사하는 공포는 사실 이 영화에는 없다. 존재하지만 끄트머리에 잠시 잠깐 등장할 뿐이다. 그때까지 영화는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두 가족이 빚어내는 문화적 차이와 이해적 다름을 공포의 소재로 삼는다. 중요한 건 그 두 가족에게 또래의 자녀가 하나씩 있다는 것이다.


어느 집이나 자녀를 기르는 나름의 방식이란 게 있다. 훈육에도 차이가 있고 격려 조언 충고에도 그 성향이 다르다. 중산층으로 보이는 도시 가족은 그래서 시골에서 사는 의사 가족의 방식이 내내 불편하다. 그건 다른 거지 틀린 것은 아니기에 그들도 최대한 받아들이고 인내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강도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서자 분노하고 폭발한다. 하지만, 달리 시골 가족의 양육 방식에 개입하거나 방해할 명확한 근거 또한 없다.


더욱이 그들은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그야말로 완벽한 타인이다. 거주하는 국가도 언어도 다르다. 도시 가족이 이곳으로 휴가를 온 건, 시골 가족의 아빠 직업이 의사였기 때문이다. 전문직으로서 의사가 갖고 있는 일종의 선입견이 그들을 초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직업이 의사가 아니고 백수란 것을 알았을 때의 실망감과 당혹감은 고스란히 화면에 드러난다.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섬세하게 화면에 담은 그 무채색의 감정 제어는 이 영화가 주는 가치다.


결과적으로 시골 가족은 여행지에서 만난 다른 가족을 집으로 초대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으로 밥벌이를 한다. 무엇보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소심한 성격의 아들은 다른 가족의 자녀로서 납치하자마자 혀를 잘라 말을 못 하게 처리한다. 정확하고 반복적으로 치러진 경험에 의한 이 패턴은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너무 현실적으로 표현되어 고개를 돌리게 한다.


전혀 다른 두 가족이 함께 보내는 며칠 동안의 기록은 범죄를 저지르는 시골 가족이 어떻게 분위기를 장악하고 범행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효율적인 관습을 비추는데 주목한다. 하지만, 그것을 관객은 일절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연출은 섬세하게 흐른다. 집안 어디에도 가족사진은 없다. 냉장고에 붙은 도시 가족을 초대한 단체사진만이 덩그러니 놓일 뿐이다. 2층 집에서 지내는 것도 일종의 복선이다. 외딴 시골에 덩그러니 놓인 그곳에서는 주변을 모두 감시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것이다. 도시 가족이 지내는 방에 불투명한 유리가 놓인 것도 마찬가지다. 초대받았으나 감시받고, 환대하고 있지만 목적이 또렷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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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가족의 아빠가 늦은 밤 창고에 있을 때, 혀가 잘린 (남의 집) 아들은 그의 앞으로 다가와 잘라진 혀를 보여준다. 밤마다 울고 소리 내서 신음한다. 사실을 적시할 수 없으나 어떻게든 드러내고자 했던 그 아이의 몸부림은 시골 가족의 범행이 드러난 종반부에 이르러서 뒤늦게 복기된다. 중요한 복선을 아무렇지 않게 깔아놓고 외면해버리는 이 모노 톤의 연출은 이 영화가 지닌 최고의 능력이다.


또한 도시 가족의 딸아이가 납치되고 부모가 망연자실 죽음을 맞는 장면에서도 그 어떤 감정 이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네다섯 차례 화면과는 다른 이질적이고 불편한 날카로운 배경 음악이 수시로 영화에 등장할 때만 해도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결말이었다. 그런 이유로 결말에 다다르고 나서야 왜 그런 장면을 넣었는지 이해가 된다.


날카로운 흉기로 누군가를 찌르고 총으로 쏴 죽이고 협박하고 감정적으로 극한에 몰아 좌절시키게 만드는 공포는 지금까지 숱하게 봐왔다. 슬래셔 무비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어지간한 공포는 공포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이를 가진 부모의 마음으로 관람하면서 도무지 차분하게 관람할 수 없게 만드는 영화였다. 상영시간 내내 불편했고 무슨 일이 벌어질까 노심초사했다. 더욱이 자녀를 인질 삼아 도시 가족을 무력하게 만드는 시골 가족의 행태는 그간 얼마나 많이 자행하면서 학습되었는지 그 어떤 머뭇거림도 없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을 보여 더욱 놀라웠고 무서웠다.


도시 부모는 싸늘하게 죽음을 맞이했고, 그 아이는 혀가 잘린 채 다시 이 시골 가족의 일원이 되어 어느 휴양지로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어떻게든 싸워서 이길 것으로 기대했던 희망적 회로는 처참하게 부서져버렸다. 불편한 나머지 역겨울 정도의 결말이었다.


죽자고 따지는 마음으로 조금 아쉬운 것은 그간의 범죄 행위가 이토록 그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행해져왔다는 영화 속 설정이다. 도시 가족은 그렇게 실종 처리되었겠지만, 시골 가족에게 떠나기 전 지인에게 여행을 간다고 알리기도 했다. 또한 레스토랑에서 거하게 저녁을 먹고 카드 결제도 했다. 주변 CCTV와 카드 결제 내역도 아쉬운 부분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영화 속 범죄가 응징 받지 아니하고 계속 진행형으로 끝나는 것에 대한 분노에 기인한다.


낯선 자를 조심해야 할 것. 이유 없는 누군가의 호의에 선뜻 응하지 않아야 할 것. 직업 따위가 지닌 선입견에 빠지지 말 것. 함부로 남의 집에서 그것도 며칠간 보내지 말아야 할 것.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은 생각보다 많고, 오늘날 절실할 만큼 중요한 것들이다.


<영화 자세히 보기>

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59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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