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가까운 곳에 진로센터가 있다. 비정기적으로 가족단위로 즐길만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바 자주 신청해서 즐겼는데 이번에는 루미큐브 보드게임을 펼친다고 했다. 공지를 늦게 봐서 부랴부랴 신청하고 참여 여부를 전화로 묻는 등 다소 주책맞은 짓을 벌였다. 신청을 두 명단 위로 받는지라 나와 첫째 아이 이름으로 신청했고, 아내와 둘째는 응원을 위해 동행했다. 참가팀은 총 8팀으로 2팀 단위로 게임을 이어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했다.
스마트폰이 대세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대체할 만한 콘텐츠가 절실히 필요했던 시점에 보드게임을 접했다. 여러 장의 카드 중에 2장 단위로 뒤집어 짝을 맞추는 메모리 게임을 시작으로 부루마블에 이르자 절정에 다다랐다. 어릴 적 놀 거리가 지금과는 달리 현저히 부족했던 당시 내가 아는 유일한 보드게임은 부루마블이었는데, 글쎄 알고 보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백수천 가지의 보드게임이 있더라. 봄과 가을에 열리는 보드게임 박람회에 매년 참석했고, 특별 할인이란 네 글자에 현혹되어 적잖게 보드게임을 사들였다.
거의 매일 밤이면 종류별로 보드게임을 즐겼다. 개인전과 팀전을 오갔고, 승자와 패자가 드러났다. 순서에 따라야 했고 정확한 규칙에 입각하여 게임을 진행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가장 어린 둘째 아이를 위한 혜택을 가끔 허락했지만 배움이 빠른 녀석은 두세 번 혜택을 경험한 뒤에는 동등한 입장에서 게임하기를 바랐다. 어느 게임을 해도 초반엔 늘 내가 1등을 했으나, 습득력이 빠른 두 아이는 회차가 10회를 넘지 않는 시점부터 굳건한 승리의 맛을 얻기 시작했다. 짧게는 보드게임 한번 하고 땡 쳤지만, 그렇지 않은 날엔 두세 시간을 온전히 보드게임에 몰입했다. 모두가 지쳐서 '이제 그만~'을 외치면서도 매 순간 희비가 엇갈리는 그 짜릿함은 달콤하고 짜릿했다.
아내와도 토닥거리고 아이들과도 신경전을 펼쳤다. 할리갈리, 원카드, 고피쉬, 메모리 게임, 타코캣고트치즈피자 등 단순하지만 순발력이 필요한 카드 게임은 애피타이저로 즐겼다. 티켓 투 라이드, 커피 러시, 스플래시, 고스트헌터, 우봉고 등은 전략과 두뇌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다빈치 코드, 킹도미노, 큐보사우르스, 마이크로로봇 등은 빠른 판단력과 선택이 뒤따랐다. 스틱 스택, 머핀 타임, 드랍더네트, 젠가 등은 손과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가동되어야만 했다. 최근에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은 카탄이었다. 약간의 운과 전략 그리고 상호 간의 자원 교환 등 게임 한판에 필요한 다양한 능력을 요구하는 게임이라 그 맛이 쏠쏠했다.
그러던 중 보드게임 대회 소식을 듣고 약간의 과장을 보태 특별훈련에 돌입했다. 2인 1조로 진행되기에 말보다는 행동과 눈치로 사인을 주고받는 연습도 했다. 모두 세 번을 이겨야 최종 우승인 구조였다. 운칠기삼이라고 하지 않던가. 주사위를 던지는 대부분의 게임에 통용되는 말일 테지만, 루미큐브만큼 운칠기삼이 필요한 게임도 없을 것이다. 시작하면서 갖게 되는 14개의 칩. 그리고 이후 갖고 오는 칩. 바닥에 깔린 구성에 내 것을 더하기 위해 나누고 더하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기술은 필수였고, 운이 없으면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조합되지 않은 숫자를 갖고 애간장만 녹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운이 잘 따랐다. 게임을 주도한 첫째 아이의 위트도 적중했다. 종반부에 이르러 칩을 하나 갖고 오는 과정에서 첫 번째 고른 것을 과감히 버리고 두 번째 것을 고르라던 다소 허무맹랑한 유사 과학에 기댄 내 힌트도 통했다. 연거푸 세 번을 모두 이겼다. 규모를 떠나 1등을 거머쥐었다. 얼마 전 초등학교를 졸업한 녀석의 얼굴에 '환희와 감격'이 드러났다. 격렬한 하이파이브를 나눴고, 매번 상대에게 수고하셨다는 정중한 인사를 전했다.
응원까지 와준 아내와 둘째까지 한 가족으로 챙기며 가족 모두 하나씩 선물을 고르라고 하자 둘째의 입이 귀에 걸렸다. 안 그래도 알뜰한 생활력이 벌써부터 느껴지는 녀석은 그중 가장 비싼 브랜드 텀블러를 골랐다. 집으로 와서는 보다 규모가 큰 루미큐브 대회에 대해 살펴봤다. 아내가 이제 그만 하라 한다. 그래도 뭐 어떤가. 이런 기분, 조금 더 취해도 좋은 것 아닌가.
보드게임의 맛. 10여 년 넘도록 즐긴 그 맛이 1등이란 타이틀과 함께 모처럼 감칠맛 나는 하루였다.
네 식구 오붓하게 더 벅차게 즐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