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독서일기] 그거 사전 ㅣ 홍성윤 ㅣ 인플루엔셜

by 잭 슈렉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가 있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그가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적대적 가문으로 인해 벌어지는 안타까움을 장미라는 꽃의 이름으로 빗대어 들려주기도 한다. 어릴 적 이유도 없이 '거시기'란 단어만 들으면 괜히 웃음이 났다. 정확히 무언가를 특정 짓지 못할 때, 뭉뚱그려 표현할 때 쓰이던 그 말이 훗날 알고 보니 표준어였다니.


두 아이의 아빠로서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어떻게 지을지 고민했던 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살아 있거나 그렇지 않은 사물이라 하더라도, 세상 모든 것들엔 이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끔은 정확한 이름 없이 그야말로 '거시기'처럼 뭉뚱그려 표현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저거 뭐였지? 저 이름이 뭐였더라? 아 분명 알았는데? 식으로 고민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거의 매일 마주하면서도 그 이름이 뭔지 생각해 보지 않은 대상은 더더욱 많다.


tangerines-1721566_640.jpg


그런 마음을 담아 저자가 쓴 책의 제목은 <그거 사전>이다. 그야말로 거룩하지 않을 수 없다. 현직 신문사 편집 기자로 있는 덕에 무수히 많은 그거들에 대한 표현력은 무궁무진하다. 멋들어진 주연배우는 아니지만, 신 스틸러의 조연배우도 아니지만, 왠지 보고 난 뒤 생각나는 아주 작은 단역이 영화에 있듯. 우리는 이제 우리 곁에 존재하는 여러 소소하고 작은 티끌 같은 존재들에 대해 잠시 관심을 가져볼 여유를 가져야 할지 모른다.

소외받고 외면받은 것들에 정성껏 관심을 선사할지어다.


하드커버 책의 꼬리처럼 길게 달리 줄, 으리으리한 대문에 달려있는 사자 모양의 손잡이, 빵을 여미는데 쓰는 끈 그리고 플라스틱 조각, 귤에 달린 그 하얀 거, 초밥 사이에 빼꼼히 고개를 내민 초록색 잎, 카레를 담는 부드러운 곡선이 매력적인 그릇, 가방에 달린 끈 조절 플라스틱, 펌프형 제품에 처음 끼워져 있는 안전고리, 커피를 젓는 가운데 꾹 눌린 짧고 단단한 막대, 마트 계산대에 등장하는 세모 모양의 막대, 군번줄이라고 흔히 말하는 줄 아닌 줄, 소주 병뚜껑의 꽁다리, 옷 사면 달려 있는 하얀색의 단단한 끈, 제법 규모가 큰 중국집에 가면 있는 원형 테이블 위 돌아가는 테이블, 방파제에 있는 사각 모양의 구조물, 겨울 밭 위를 굴러다니는 마시멜로 같은 그거, 같은 겨울나무를 감싸고 있는 지푸라기 덩어리, 아이를 등에 업을 때 쓰는 천 등등...


beach-1866992_640.jpg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그것들이 우리 주변에 있고, 그것들의 이름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진 배경과 역사적 배경이 이 책에 담겨 있다. 무엇보다 의식의 흐름처럼 이어지는 아주 약간의 주관적이면서 섬세한 관찰력이 있어야만 풀이될법한 저자만의 위트가 속속들이 숨 쉰다. 읽다 보면, 그래 맞아! 나도 그랬어!라는 식의 감탄사가 미간 사이에서 피어오른다. 하지만 읽고 나면 거짓말처럼 그것들의 이름을 까먹게 되는 마법. 어쩌면 책에서 다뤄지는 그것들의 숙명과도 같은 것일까.


미안한 마음에 몇 개는 반드시 그 이름을 기억해 보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2000년대 극 초반, 넓고 얕은 지식 덕분에 몇몇 지인들에게 '주부 잡지'란 별명을 듣기도 했다. 분명 아는 건데 이름을 잘 모를 때, 어느 배우가 나오고 어떤 내용인지 아는데 영화 제목을 모를 때. 나는 매번 그 대답을 해주었다. 그렇다고 뭔가를 제대로 아는가? 또 그렇진 않았다. 말 그대로 내 기억력에는 인덱스의 첫 줄 정도까지의 정보만 있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드니 주부 잡지가 폐간이라도 한 것인지 나 역시 떠오르는 속도가 더디다. 머릿속 버퍼가 줄어들었는지 인덱스의 첫 줄은 고사하고 ㄱㄴㄷㄹ 인덱스마저 사라진 기분이다. 더 열심히 읽고 쓰고 발휘해야 할 것만 같다.


<책 자세히 보기>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4398656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독서일기]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ㅣ 정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