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은 어떻게 계급이 되는가 ㅣ 나영웅 ㅣ 지음미디어
남들은 한 번 보기도 쉽지 않은 호러, 스릴러, 고어 영화를 좋아한다. 하물며 기분이 우울하거나 침체되어 있으면 <샤이닝>과 <세븐> 중 하나를 선택한다. 끝없이 펼쳐질 것만 같은 화면 속 그 분위기에 2시간 남짓 빠져있으면 내가 겪고 있는 우울감이나 침체된 기분 따위는 금방 잊히곤 한다. 또한 동시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8월의 크리스마스>를 꼽는다. 인생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감정들이 그토록 절제되어 표현되는 서사가 내겐 그 어느 영화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Rock will never die!'를 외치며 록 메탈에 빠져 있으면서도 우연히 접한 익스트림 메탈과 더불어 또 우연히 접한 라디오 애청자 모임 활동을 통해 그야말로 잡식성 음악 듣기를 즐겼다. 달랑 3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듣는 음악 취향을 도저히 모르겠다며 두 손 두 발 모두 다 든 아내는 어지간해서 내가 음악을 들을 때같이 듣기를 꺼려 한다. 고로 나는 늘 집에 혼자 있을 때 음악을 듣거나, 가족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 음악을 듣는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을 품에 안고 죽도록 몰아치는 데스메탈의 폭풍우를 견디며 잔잔한 영화음악의 수면 위로 유유자적 가볍게 걷기를 반복한다.
취향 참 독특하단 얘기를 많이 들었다. 어쩌란 말인가. 그게 내 취향인 것을. 하지만, 단 한 번도 내 취향을 누군가에게 강요한 적 없고, 말 그대로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며 살아왔다. 취미란 단어보다 취향이란 단어를 더 좋아했고, 성향이란 단어보단 취향이란 단어가 한결 더 인간적이라 느껴왔다. 20세기 말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본 <타인의 취향>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한 번쯤은 '취향'에 대한 언급이 단행본으로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다.
취향과 계급을 묶은 저자의 아이디어는 기발했다. 취향 습관 삶의 양식을 뜻하는 '아비투스'라는 용어와 와 일찍이 '구분 짓기'를 언급한 피에르 부르디외라는 사람의 존재는 이 책에서 몹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저자는 이 두 요소와 그 배경을 통해 본인의 성장 배경이라는 주관적 서사를 꾀어 취향을 들려준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같은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아픔과 애절함 그리고 진솔한 경험이 느껴져서 좋았다.
하지만 제법 웅장하게 시작한 취향과 계급에 대한 언급은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담이라는 샛길로 한참 빠져든 이후 용두사미의 느낌으로 흐릿해진다. 어긋난 맞춤법과 오탈자, 그리고 자주 보이는 비문에서 유독 그 느낌이 강해졌다. 전체 볼륨을 다소 줄여서라도 취향과 계급이라는 두 가치에 대해 제대로 치고받고 싸우듯 다뤘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취향과 삶에 이토록 솔직하고 진취적인 도전정신을 갖고 꾸준히 전진한 저자의 시간은 칭찬하고 또 칭찬할 일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의 자전적 이야기가 취향과 계급이라는 명제와 더불어 고민하고 방황하는, 일부 불안해하는 청춘들에게 또렷한 이정표가 되어줄지도 모를 것 같다.
결국 어느 계급에 속해 있든, 어떤 취향을 갖게 된들... 우리는 같은 곳으로 향해 가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인생이고 삶이고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숙명의 일종이라고 나는 생각해 본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즐기고 싶은 것. 조금 거리를 두게 되는 것.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더 많은 도움이 되고 더 편안한 것을 품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취향이 되는 것이고, 그 순간은 계급이라는 체계마저 벗어나는 것이라고 역시 생각해 본다.
자본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계급'은 결국 존재한다. 삶을 단순히 성공과 실패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지니지 않아도 되는 만큼, 그 계급에 굳이 속하지 않고서라도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견디고 버티고 이겨내면서 다소 느린 속도라 하더라도 전진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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