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면 여행자가 된다

치킨 - 2011년 30대

by 잭 슈렉

비가 오는 날이거나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면 저는 어김없이 버스를 탔습니다. 바람을 쐬고 싶고 일상에서나마 잠시 해방되고 싶을 때에도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집을 나서는 주머니는 가벼웠지만, 돌아오는 길의 마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웠습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설렘과 흥분을 늘 안겨주었습니다. 버스의 동그란 네 바퀴는 매번 같은 길을 따라갔겠지만, 네모난 창밖으로는 매 순간 다른 풍경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종점여행>이라 직접 이름 붙인 여행에 필요한 준비물은 무척 단출합니다. 처음 종점여행을 시작하던 그 시절에는 회수권 두 장이면 충분했습니다. 환승을 하려면 추가로 회수권을 더 챙겨야 했습니다. 이제는 교통카드 한 장이면 부담 없이 환승을 할 수 있으니, 그때보다 여행할 수 있는 곳이 더 많아진 것 같아 뿌듯한 기분이 듭니다.


참! 회수권 두 장 외에도 챙겨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여행 내내 귀를 즐겁게 해 줄 CD플레이어를 가방에 넣고, 듣고 싶은 CD를 고르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행 내내 눈과 귀가 즐거우니 그 마음을 기록하고 남길 노트와 펜도 준비합니다. 차가 막혀 여행이 길어질 수도 있으니 마실 물과 간식도 미리 마련합니다. 더운 여름이면 냇가에 발을 담그기도 합니다. 때문에 손수건도 꼭 챙깁니다.


준비물이 모두 갖춰졌으니 이제 종점여행을 떠나보도록 하죠. 버스를 타면 맨 뒷자리 창가 자리에 앉습니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의 시작을 만끽합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굳이 지하철을 이용해 서둘러 갈 필요도 없습니다.


자가용으로 가고 싶은 곳만 골라 가는 것도 좋지만, 정해진 노선을 따라 즐기는 여행의 맛 또한 달콤합니다. 막히면 느긋한 마음으로 창밖 풍경에 깊이를 더하고, 뻥 뚫린 길을 달릴 때면 창문을 조금 열어 바람을 들이켜 봅니다. 창문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눈이 내리는 날이면 세상이 하얀 옷을 입는 모습을 따뜻한 버스 안에서 감상합니다.


우리 몸의 모세혈관처럼 버스는 세상 구석구석을 다닙니다. 사람들로 붐비는 도심을 가로지르며, 사람 구경 세상 구경이 지루하지 않아 좋습니다. 꾸불꾸불한 좁은 골목길을 들어서면 옛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납니다. 한강을 가로지를 때면 다리가 짧은 것이 너무 아쉽기만 합니다.


등산객들의 단골 코스 북한산에도 가고 한가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공원에도 갑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냄새가 물씬 느껴지는 재래시장과 역사가 숨 쉬는 고궁... 그리고 다양한 먹을거리가 있는 신당동 떡볶이 타운도 가고 신림동 순대 타운도 갑니다.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이야기가 넘치는 명소를 버스를 타고 여행합니다.


그 여행 속에는 풍경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풍경 속을 가득 메우는 사람들 또한 존재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마주하면서 저는 복잡했던 생각을 정리하고 스스로를 돌이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종점여행을 무척 매력적인 여행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재래시장 입구에는 소쿠리 몇 개로 좌판을 꾸민 허리 굽은 할머니

세상에서 분리된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 있는 양복 차림의 아저씨

뜨거운 태양 아래 일하는 땀으로 흠뻑 젖은 노동자


무거운 장바구니를 끙끙거리며 들고 가는 파마머리 아주머니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거리 곳곳을 누비는 배달원

거리를 거니는 사랑하고 연애하는 젊은 연인들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늘어진 어깨로 앞을 향해 걷기만 하는 학생

노란색의 반바지와 모자를 입고 엄마 품으로 뛰어가는 꼬마들

사람들에게 맞춰진 초점은 풍경으로 퍼져갑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거리의 가로수들

잿빛 빌딩을 집어삼킬 듯 붉게 타오르는 스모그 저편의 노을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면 고요함을 버리고 너울을 일렁이는 한강


쓱싹쓱싹 손가락으로 덧대어 그림 그리는 푸른 하늘의 뭉게구름

신호등 위에 앉아 있는 분주한 모양의 참새 몇 마리

긴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거리를 활보하는 누렁이 검둥이 백구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야 만날 수 있는 달동네의 공터



두세 시간 남짓 떠나는 여행길에는 형언할 수 없는 많은 그림들은 조각이 되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달리고 있는 버스는 도심에 가까워질수록 붐비다가도 종점에 이를수록 한가해집니다. 때때로 넘쳐나고 혹은 모자란 우리 인생처럼 말이죠.


14살 때 처음 시작한 종점여행이 올해로 19년을 맞이합니다. 결혼 후 아내와 함께 종점여행을 했듯이 몇 년 뒤에는 예쁜 아이와 함께 세 식구가 오붓하게 종점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가족에게 미처 들려주지 못하고 보여주지 못했던 풍경들을 함께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때에는 지금 보다 더 많은 풍경과 이야기들을 버스를 타고 만나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버스 맨 뒷자리는 우리 가족 전용 자리가 되어 늘 함께 할 수 있길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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