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영화의 언어 ㅣ 이다혜 ㅣ 시간의흐름

by 잭 슈렉

2시간 남짓, 영화를 관람하면서 느꼈던 감정의 일렁거림은 정작 영화가 끝이 나고서부터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좋은 영화를 관람한 뒤 이어지는 들썩거림은 좀처럼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풀어야만 했다. 때로는 술을 마셨고 때로는 글을 썼다. 영화를 보고 나서 글을 쓰는 일이 감동을 확장시키거나 영화의 여운을 진정시키는 데에 있어 어떤 효과를 주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막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글을 쓰고 나면 기분이 그렇게 좋았다. 그것은 영화뿐만이 아니었다. 음악을 들어도 마찬가지였고 공연을 다녀와도 매한가지였다. 다만, 좋아하는 것을 일로 할 때의 부담이 미처 경험하기도 전에 어떤 건지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딱 거기까지였다.


단 한 줄짜리 평론가의 20자 평부터 씨네 필의 후기까지, 영화 한 편을 두고 벌어지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은 영화 이상의 분량으로 늘 압도한다. 영상의 언어를 텍스트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놓쳐버린 무언가를 발견할 때의 쾌감은 팬덤이 주는 가장 큰 행운이 아닐까 싶다. 가열차게 그 필드에 몸을 던져 몇 년간 즐겨보기도 했다. 하지만, 금방 지쳐서 한동안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바라봤다. 그렇지만, 그 매력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또 스멀스멀 엄지발가락부터 살짝 걸쳐놓고 고개는 반대편을 향한 채 괜히 쭈뼛쭈뼛 서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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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마지않는 <씨네 21>의 에디터가 저자로 또 한 권의 영화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하지만 꼭 해야 할 말들만 차분하게 모았다. 다뤄지는 작품의 심도가 깊지는 않지만 나름의 주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범위는 제법 넓다. 그것은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를 좋아하는 동지들의 언어이자 감성이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공통점이 많다. 수긍이 되고 고개가 끄덕여지다가도, 분명 같은 느낌인데 이를 이렇게 풀어나간 저자의 언어에 묘한 질투심과 시기를 느끼면서 다음 책장을 넘겼다.


어떤 주제 아래 서너 편의 영화가 크로키 하듯 이어진다. 그 짧고 굵게 다뤄지는 기껏해야 한두 신의 토착물을 함께 공감할 때의 희열이 있다. 취향이 달라 강 건너가 아닌 바다 건너 이야기처럼 들리는 영화는 괜히 메모를 한다. 이렇게 봐야지 봐야지 메모해둔 영화만 수백 편이다. 그래도 좋다. 더 늘어난들 어떻고 다 보지 못한들 어떠리. 메모하는 그 순간만큼은 이미 그 영화를 본 것만 같다. 욕심을 잘 안 내는 성격인데 그런 욕심은 욕심 자체만으로도 흥분된다. 지금보다 아이들이 조금 더 크고, 내게 허락된 자유시간이 더 많아진다면 여한 없이 그 욕심을 뒤늦게 해소하겠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어느 정도 영화를 좋아하는 이에게 몹시 높은 수준의 흡입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그 경계가 어디라고 딱 꼬집어 말하긴 힘들겠지만, 최소 반 이상은 고개를 끄덕였기에 오른팔 높게 들고 저요 저요 외치고 싶다. 책은 크게 세 개의 주제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는 연기, 두 번째는 음향과 미장센, 마지막은 감독의 시선과 메시지다. 흩어 놓기엔 너무나도 깊은 연결성을 지니고 있는 이 세 주제는 저마다의 작품을 통해 일상의 언어와 마니아의 정열로 새 옷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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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번이고 천 번이고 영화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미 남겨진 무수히 많은 예술에 언제든 새 옷을 입힐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을 즐기는 그 경험이 언제나 늘 새롭다.


<영화가 손짓하는 쪽으로 한 걸음 더>라는 부제는 그 경험을 선뜻 허락한 이들에게 더 깊게 다가올 것만 같다. 한 걸음 내디딘 다음, 잠시 쉬고, 큰 숨 쉬어 맑은 정신으로 가다듬게 되면 또 좋은 작품을 관람해야지. 관람하고 나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나랑 비슷한 누군가의 글을 찾아 한계 없는 온라인의 물결에 작은 배 띄워야지. 돛을 굳이 세울 필요 있을까. 물결 따라 흘러가도 이리 좋은데.


<책 자세히 보기>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9302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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