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수필 : 슬픈 인연

by 잭 슈렉

명동에서 남대문으로 향하는 고가도로였다. 평일 오후 4시의 거리는 꽉 막힌 차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내가 탄 버스는 아까부터 한참 동안 고가도로 한복판에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동을 꺼도 될 정도였다. 초여름의 날씨라 제법 더웠다. 에어컨이나 손 선풍기를 상상할 수 없었던 1996년이었다. 배워두면 좋을 것 같아 덜컥 캐드 학원을 접수했다. 집에서 학원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 참 좋았다. 하지만, 충무로부터 명동 남대문 서울역을 관통하는 노선이라 좀처럼 시원하게 달리는 꼴이 없었다.


그렇게 고가도로 꼭대기에서 창밖 도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샛말로 멍 때리고 있었던 거지. 버스는 정말 그 자리에 아예 멈춰서 있었다. 지루함을 참기 힘들었는지 기사 아저씨는 라디오를 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미가 부르는 <슬픈 인연>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선곡, 기다리지 않은 노래, 상황과 분위기와 온도와 기분 등 모든 것들과는 전혀 썩 어울리지 않는 곡이었다. 그런데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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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 뒷자리에는 나 혼자뿐이었고, 앞에도 기껏해야 예닐곱 명이 전부였다. 그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박자를 맞추는 일도 없었다. 저마다 창밖으로 고개를 적당히 돌렸을 뿐이었다. 어떤 특별한 장면이 연출되진 않았지만, 3분 남짓 이어지는 노래가 흐르는 동안만큼은 그전과 달라도 너무나도 다른 그 어떤 정서가 펼쳐졌다. 나만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었겠지. 유난히 좋아하는 노래도 아니었고, 어려운 어른들의 언어가 가슴에 깊게 스며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분명 그때 <슬픈 인연>은 지루하고 답답했던 그 순간을 낭만적이고 따뜻하게 품어주는 기분을 들게 했다.


노래가 끝나자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가에서 내려와 정류장에 이르자 남대문 시장에서 무언가를 잔뜩 산 아주머니 일행이 승차했다. 고요하고 적막했던 노래가 끝난 뒤의 차분함이 일상 속 소음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두 번도 아닌, 단 한 번뿐이었지만 그 노래를 들은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내리쬐는 햇살, 더운 공기, 아주 가끔 불어오는 바람, 움직일 생각 없는 버스, 창밖으로 내려다보는 도심 풍경, 그리고 스피커에서 3분여 흐르던 음악까지 모든 것들은 박제가 되어 고스란히 남아있다. 쉽게 사라지지 않을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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