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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 슈렉 Mar 16. 2024

놀면서 일하는 방법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운이 좋았다. 말 그대로 운이 좋았다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일찍이 군 면제였고, 전문대 졸업하자마자 다닌 첫 직장은 기간 대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재빠르게 동료를 따라 이직했고 두번째 직장에서도 기간 대비 많은 것을 배웠다. 흡수율이 좋은 나이였을까. 그렇게 얼마 안되는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가당치도 않게 놀면서 일하는 노선을 택했다. 누군가 그런 모양새를 일컬어 '프리랜서'라고 할것이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때 나는 프리랜서였다. 가난했지만 즐겁고 행복한 그래서 배고픈걸 몰랐던 시절이었다.

 

차라리 겁이 많았다면 안전한 노선을 택했을지 모른다. 겁도 없었고 두려울 것도 없었다. 서울 한복판에 태어나 결혼전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된 것도 돌이켜보면 나름의 특혜가 맞다. 저 할일 늘 잘했던 막내아들이었기에 간혹 내가 무슨일을 한들 침묵의 관심만 가져주셨다. 놀면 노는대로, 일이 있어 나가면 나가는대로 묵묵히 응원해주셨다. 놀면서 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공은 부모님이란 사실을 마흔이 넘어서 깨우쳤다. 


인연이란 참 소중하고 뜻밖의 일이 분명하다. 음악듣기를 좋아하고 영화보기를 좋아했을 뿐인데 그런 취미로부터 내 청춘의 20대를 수놓을 여러 컨텐츠들이 시의적절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짧게는 이틀 길면 사흘을 마감때만 출근해서 음악잡지 디자인을 도왔다. 꼬박 3년하고 몇개월을 더 이어갔다. 홍대 어귀 눅눅한 지하의 사무실이 풍기는 습기 가득한 공기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에 남아있다. 어릴적 선망하던 그 잡지에 차마 기자는 될 깜냥이 못됐고 서브 디자이너로 잡지 만들기에 발을 담궜다는 사실은 날 흥분의 도가니탕으로 이끌었다. 홍대가 내 직장이라니!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인연은 이제 막 창간하는 음악 무료 잡지로 날 이끌었다. 초반 몇개월은 필진과 디자인을 맡다가 언제부턴가 편집장으로 반강제적인 승진이 이뤄져 내인생 최고로 빡센 노가다 시절을 보냈다. 한달 30일 중 딱 2일을 빼고 28일을 매일 중노동으로 보냈다. 생각해봐라. 160페이지의 잡지를 편집장과 디자인까지 도맡는다는건 지금 생각해도 두번 다시 할 수 있는 일은 아녔다. 술이 필요했고 여자가 필요했다. 여기서 여자는 당시 짝사랑 전문가였던 내겐 필수 요건이었다. 청춘시절의 나는 늘 누군가를 좋아했다. 좋아만했다. 빌어먹을. 


무료잡지가 유료잡지로 바뀌면서부터는 소극장 포크 공연과 음반 제작 유통을 함께했다. 200여석 규모의 소극장 공연이 한달에 2회씩 20여회차 이어졌다. 그 사이 잡지는 폐간을 했어도 공연은 이어졌다. 홍보물 디자인, 리허설 진행, 사진 촬영, 현장 진행, 마무리까지 모든 것을 담당했다. 한국 포크 1세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그들의 무대를 다시 꾸민다는 일은 나를 늘 흥분시켰다. 10원 한푼 보수는 없었지만 그깟 몇 푼되는 일당에 견줄 일이 아니었다. 


여러 공연 중 뇌리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는 순간은 기타리스트 이정선 공연이었다. 100석도 채 안되는 종교시설 특정 공간에서 공연을 펼쳤는데 장소가 워낙 좁은 탓에 리허설때 사진 촬영을 이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아티스트는 하모니카를 꺼내 <한국사람>을 연주했다. <내사랑 내곁에>를 부른 김현식의 앨범에서 처음 마주했던 곡, 물론 원곡이 이정선이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별도의 셋 리스트가 없던 작은 공연이었기에 그 곡이 들려올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서둘러 사진 촬영을 끝냈고 잠시 쉬는 시간. 용기를 내서 연주자에게 간청했다. 그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그래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죄송하지만, 제 인생 소원입니다. 한 번 만 더 연주해주실수 있으실까요"


나는 그의 바로 정면 앞에 앉았고 그의 연주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나만을 위한 연주. 오직 나만 듣는 연주. 눈을 감고 경청했다. <한국사람>의 멜로디는 내 두 귀로 흘러들어와 내 온 몸에 각인되었다. 연주가 끝나고 너무 좋아 몇번을 반복해 인사를 드리자, 내게 악수를 청하며 되려 고맙다고 인사를 해주었다. 


앞서 소개한 3~4년의 시간동안 서울과 가까운 고양시 어느 곳으로 한달에 한번씩 방문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레코드사 중 하나로 스튜디오를 직접 갖고 있었고 산울림과 조용필 등의 앨범을 발매한 그곳에 또 다른 인연이 닿아 홈페이지를 기획 제작 운영 관리 해주는 일을 겸했었다. 매달 방문해서 그달의 신보를 받아와 사이트에 올렸다. 일하는 기간을 통틀어 단 한번의 잡음 없이 아름다운 마무리를 지었다. 실장님은 내게 하나 고르라며 제안을 주셨고, 기꺼이 나는 산울림 박스세트를 선택했다. 당시 기준 레코드사에도 보관용으로 열개도 안되는 것을 득템한 것이다. 오! 나의 산울림!


쇼핑몰, 학원, 영화사 홈페이지등 굶어죽을만 하면 어디선가 인연의 끈이 내게 닿아 굶주린 내게 밥과 술을 먹여주었다. 밤 10시쯤 종로에서 술마시고 노는데 홈페이지 어디가 잘못됐다고 전화를 받던 날엔 부랴부랴 pc방을 가서 사이트 수정을 해준적도 있었다. '조폭'이라고밖에 다른 표현이 없던 사이트 의뢰자는 무한한 감사를 내게 하며 보너스도 이체해주었다. 


엉거주춤 하던 시절엔 남성잡지에 잠깐 엉덩이를 부볐다. 변태력 100만인 지금이라면 찰떡궁합이었을텐데 당시엔 내 변태력이 100도 채 안됐던 시절이라 서둘러 엉덩이를 뺐다. 어깨너머 배운 프로그램으로 금형설계 일도 종종했다. 굶어죽을만 하면 돈벌일이 생겼다. 그 돈으로 마신 술기운에 쓴 글은 아주 가끔 공모전에서 당선됐다. 더 많은 술을 마실 수 있게 됐다. 


시골의 폐교에서 동요콘서트를 하는 기획에도 1년을 참여했다. 갈때도 공연할때도 올때도 늘 노는 시간이 이어졌다. 일하면서 노는 그야말로 개꿀의 시간들... 봄여름가을까지 이어지는 세번의 계절 동안 전국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 마실수 있었다. 더욱이 배운 도둑질을 써먹을 기회도 주어졌다. 그해 1년 투어를 사진집으로 만든 것이다. 별도의 보수는 없었으나 30여페이지 남짓한 책자를 만들면서 나는 동요, 어린이, 도시가 아닌 시골이란 지역에 대한 사랑의 불씨를 내안에서 마구마구 지필수 있었다. 


굶어 죽을만하면 돈이 생겨서 술사먹는 일이 반복되자 언제부턴가 그 술을 내가 팔면서 마시면 어떨까 궁리를 해보게 되었다.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충무로 어귀에 작은 소주집을 차렸다. 그리 길지 않은 1년 반을 장사했다. 테이블 5개 의자 20개를 두고 신나게 즐겼다. 친구들도 좋아했다. 알바하는 친구네 가게가 아닌 사장인 친구네 가게는 결부터 달랐다. 마지막에 들어오는 놈은 셔터를 내렸고 아침까지 마셨다. 밤새 마셨다. 술은 밤새 마셔야 제맛 아니던가. 큰 돈은 못 벌었지만 손해는 안봤다. 나혼자 안주준비 조리 서빙 설거지 청소 다 했으니 따로 나갈 돈도 없었다. 그때도 내겐 개꿀이었다. 


몇번의 짝사랑. 

몇번의 굶주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었을 몇번의 찰나들이 오가면서 20대는 마무리 되었다.


30대를 1년 앞둔 29살엔 제법 안정된 직장에 몸담았고 짧고 굵게 1년 연애 후 내 나이 서른에 결혼을 했다. 그 덕에 20대 내내 그토록 목놓아 부르던 광석이 형의 <서른 즈음에>를 나는 일절 고통 없이 열병 없이 보낼 수 있었다. 


청혼할때 통장 잔고는 놀면서 일했던 20대의 나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았다. 다행히도 아내는 나를 사랑으로 보듬어주었고, 넉넉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만족스런 이후를 보낼 수 있었다. 


아내를 맞이하고 17년이 흘렀다. 그 사이 두 아들도 생겼다. 남편으로서 또 아빠로서 분주했던 시절은 어느정도 지났다. 그야말로 '내 시간' 그 전보다 많이 생긴 요즘이다. 그러니 스믈스믈 내겐 청춘의 욕망이 다시금 피어오른다. 


놀면서 일하는 방법에 대한 확고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벌써부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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