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챗GPT는 만능이 아니었다

실전에서 배운 세가지

by 갓진주

2024년 6월 4일 화요일.


챗GPT를 발견한 다음 날, 나는 자신만만했다.

"이거면 되겠는데?"


어제 챗GPT가 마케팅 용어를 다 알려줬다. ROAS, CPA, CVR... 회의에서 더이상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에 기뻤다.


오늘 오후 2시, 개발팀과 회의가 있었다. 도희가 어제 말했다.

"개발팀이랑 어반 쉴드 끈적임 문제 논의할 건데, 나은이도 들어와. 프로젝트 PM이잖아."

(PM. 프로젝트 매니저.)


나는 12개월 전, 홍보팀 팀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케팅팀 과장이다. 게다가 마케팅은 처음이다.

'하지만 챗GPT가 있잖아.'






아침 8시 30분, 출근길 지하철



나는 스마트폰으로 챗GPT를 켰다.

오늘 개발팀 회의에서 뭘 물어봐야 해?

엔터.


챗GPT가 답했다.


개발팀 회의에서 확인해야 할 사항들입니다:
1. 프로젝트 일정 확인
- 마일스톤은 언제인가요?
- 각 단계별 소요 시간은?

2. 기술적 제약사항 파악
- 현재 기술 스택은?
- 제약 사항이 있나요?

3. 리소스 배분 논의
- 필요한 인력은?
- 예산은 어느 정도?
...
(이하 30개 항목 더)


"......"


'이거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거 아냐?'


당연한 말을 너무나 정성스럽게 한 챗GPT의 답변만 읽다 어느새 내릴 타이밍이 되었다.



오전 10시, 책상 앞



다시 챗GPT를 켰다. 이번엔 구체적으로 물어봐야겠다.

끈적임 문제 해결 방법

엔터.


제품의 끈적임 문제를 해결하는 일반적인 방법들입니다:
1. 제형 조정 - 오일 함량 감소 - 파우더 성분 추가 - 에멀젼 타입 변경
2. 성분 대체 - 실리콘 계열 추가 - 휘발성 용매 사용 - 겔 베이스로 전환
3. 텍스처 개선 - 입자 크기 조정 - 혼합 방식 변경 ... (이하 계속)


"아이씨..."

이것도 일반론이었다.

어반 쉴드의 '구체적인' 끈적임이 뭐 때문인지, 우리 제품의 '현재' 성분이 뭔지. 챗GPT는 모른다.

(사실 내가 안 알려줬으니까...)



오후 1시 50분, 회의 10분 전


결국 나는 손으로 직접 정리했다.

도희가 어제 건넨 서류 5개를 다시 펼쳤다.


프로젝트 현황 요약

임직원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

회의록 (개발팀 협의)

기능 변경 이력

경쟁사 비교 분석


끈적임 불만 78%. 백탁 현상 불만 65%.

현재 성분: 징크옥사이드 18%, 티타늄디옥사이드 7%...


'이걸 회의에서 어떻게 말하지?'

손에 땀이 났다.

챗GPT는 결국 안 쓰고 회의실에 들어갔다.



오후 2시, 6층 회의실


테이블에 다섯 명이 앉았다.

차도희 팀장 (마케팅)
김과장님 (개발팀)
이연구원님 (개발팀)
박과장님 (영업팀)
그리고 나.


도희가 말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어반 쉴드 만족도가 60.2%예요. 목표는 85%고요. 가장 큰 불만이 끈적임이에요."

김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징크옥사이드 함량 때문일 겁니다. 18%는 높은 편이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징크옥사이드가 뭐였더라? 아, 자외선 차단 성분! 어제 챗GPT한테 물어봤었다.

김과장이 나를 봤다.

"나은 과장님, 원래 기획안에서는 징크 함량이 어땠죠?"

"......"

나는 서류를 뒤적여 가까스로 대답했고 그 후로도 그들만의 대화가 한참 이어졌다.


대화가 점점 빨라졌다. 전문 용어들이 쏟아졌다.

디메치콘. 사이클로펜타실록산. 하이브리드 제형. 이중 에멀젼.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후 3시 20분, 회의 종료


도희가 정리했다.

"그럼 일단 징크 함량은 유지하되, 실리콘 베이스로 제형 변경. 2주 후에 샘플 나오면 다시 모이죠."

"네."

사람들이 일어났다. 나도 따라 일어났다.

김과장이 나가면서 물었다.

"나은 과장님, 기존 제형에서 어떤 성분이 문제였는지 아세요?"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 아직 파악 중이에요."

"그럼 다음 회의 전까지 정리 부탁드려요. PM이시니까."

"...네."



오후 4시, 책상 앞


나는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망했다.

아니, '망했다'는 표현도 과하다. 나는 그냥... 없었다.

투명 인간이었다.

'PM이라며? 프로젝트 매니저라며?'

눈물이 났다.




구린이에게, 나은이가



- 6개월 후 -


그 날의 나를 돌아보면, 세 가지를 몰랐던 것 같다.


구린이의 실패한 질문 #1


❌ "개발팀 회의에서 뭘 물어봐야 해?"


뭐가 문제였을까?

내가 누군지 안 알려줬다.


챗GPT 입장에서는 아마도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넌 누군데?"

"무슨 회사? 무슨 제품?"

"무슨 회의야?"


챗GPT는 내가 그런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는데도 대답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힌 충직한 종이었다. 그러다보니 일반론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정성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구린이의 실패한 질문 #2


❌ "끈적임 문제 해결 방법"


뭐가 문제였을까?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다.


"끈적임 문제"라고만 했으니, 챗GPT는:

"화장품? 식품? 코팅제?"

"원인이 뭐야?"

"목표가 뭐야?"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구린이가 몰랐던 것 #3


원하는 답의 형식을 안 정해줬었다.

"뭘 물어봐야 해?"라고 물으니, 챗GPT는 30개 정도의 항목을 리스트업 해줬다.


하지만 나는:

5개 정도만 원했고

우선순위가 필요했고

각 질문의 의도도 알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챗GPT는 마치 사람같다. 연인 사이, 친구 사이에도 내가 상황을 설명해주지 않으면 모르고, 내가 원하는 것도 감정도 모르니까


그래, 말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챗GPT라도 모른다.




다시 써 본 질문



6개월이 지난 지금. 그날의 질문을 다시 써봤다.


나은이가 다시 써 본 구린이의 프롬프트



6개월 전 나은이, 아, 아니 구린이는 이렇게 질문 했었다.

"개발팀 회의에서 뭘 물어봐야 해?"

이건 그냥 사실 13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무맥락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풀어서 설명만 해줘도 생각지도 못하게 '잘 쓴' 버전의 질문이 되는거지.

챗GPT를 마치 서로 말 안하면 잘 모르는 연인, 친구처럼 생각하고 친절하게 풀어 말해주자.

[나 + 프로젝트 + 문제 + 상황 + 목표 + 제약 + 요청 형식]




바로 쓰는 템플릿

회의 준비 프롬프트 (복붙용)


나는 [직책/경력]이야. 현재 [프로젝트명]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야.
[현재 문제 상황] - 문제1: - 문제2: - 문제3:
[프로젝트 배경] - 목표: - 현재 진행 상황: - 제약 사항:
[나의 상황] - 강점: - 약점: - 우려 사항:
[일시]에 [참석자]와 회의가 있어. 회의 목적은 [목적]이야.
회의에서 내가 꼭 확인해야 할 핵심 질문 5가지를 알려줘.
각 질문마다: 1. 왜 이 질문이 중요한지 2. 어떤 답변을 기대해야 하는지 3. 추가로 물어볼 수 있는 후속 질문 이렇게 정리해줘.

* [ ] 안을 내 상황으로 채우세요



깨달음 노트

챗GPT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구글처럼, 네이버처럼 단순한 검색 도구가 아니었다.

챗GPT는 대화 상대였던 걸 잊었다.

그가 '나'를 모르면 대화라는 게 성립되지 않는다.
상황을 모르면 조언을 못 하는 거니까.
원하는 게 뭔지 모르면 엉뚱한 답을 하는 거니까.



1. 챗GPT는 나를 모른다 → 나를 소개해야 한다
2. 챗GPT는 내 상황을 모른다 → 맥락을 줘야 한다
3. 챗GPT는 내가 원하는 답의 형태를 모른다 → 구체적으로 요청해야 한다


다음 날.

나는 다시 챗GPT를 켰다.

이번엔 달랐다.


"안녕, 챗GPT. 나는 유나은이야. 그리고..."



Gemini_Generated_Image_qcux3gqcux3gqcux.p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