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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갓미 Sep 17. 2017

알프스의 눈을 동경했던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아주 늦은 밤 12시에야 인터라켄에 도착했다. 어두워서 보지 못했던 인터라켄의 풍경이 아침에서야 황홀하게 다가왔다. 융프라우호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나섰건만 흐린 날씨 탓에 올라가도 눈보라만 볼 수 있다는 조언을 받고, 융프라우호로 가는 기차역에 있는 CCTV를 확인했다. 그야말로 눈보라로 아무것도 안보이는 상태. 융프라우호는 포기하고 중간에 있는 그린델발트 마을로 향했다.

겨울동화 속 마을 같은 그린델발트


 *그린델발트 마을 주변을 서성이다 목장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너무나 적막한 마을. 어찌나 조용한지 살며시 내리는 눈이 재킷에 닿는 소리까지 들렸다. 가지 끝마다 흰 눈을 엉킨채 정지한 침여수들 위로 인터라켄의 검은 새들이 유유히 날아다녔다. 어찌나 평화로운지, 한참을 바라봐도 질리지 않을 풍경들.

 여기서 바라만봐도 좋은데 그 좋다는 융프라우호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알프스의 산맥과 봉우리들은 높고 험준하기로 유명하지만 밑에서 바라보는 산맥들은 한겨울에도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다. 안개에 가려 수즙을 느낌이기도 했다.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 하고 인터라켄 동역으로 내려가는 길. 날씨가 개서 빛나는 하얀 태양과 함께 시원한 알프스 산맥이 그 얼굴을 드러내줬다. '내가 바로 알프스다!'하고 바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니 애가 탈 수 밖에 없다. - 2013. 11. 15. 일기 중에서



 런던-파리를 거쳐 인터라켄. 런던과 파리 모두 물이 별로 좋지 않아서 머리카락과 피부가 순식간에 상했다. 그런데 인터라켄의 물을 쓰니 린스를 한 듯 머릿결이 돌아왔다. 수돗물도 식수로 먹어도 된대서 마셨는데, 완전 삼다수. 알프스의 모습에서 왜인지 한라산을 떠올렸다. 제주를 찾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공기 좋고, 물 좋고'를 여기서 느끼게 된다. 소중한 것들은 내 바로 옆에 있어서, 잘 느끼지 못한다.


 제주의 중산간마을에서 초등학생 시절을 보낸 나에게 눈은 익숙하다. 여름엔 비가 많이 왔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왔다. 눈이 왔는데 무릎까지 쌓이지 않으면 섭섭했다. 녹는 눈이 아까워서 냉동실에 눈을 넣어두기도 했었다.(얼음이 되어버렸지만...) 시내로 온 뒤에야 제주에서 그런 눈은 중산간 마을에서나 가능하다는걸 알고 못내 아쉬웠는데, 인터라켄에 와서 한가득 눈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돌아온 숙소에서 나는 조금 외로움을 느낀다. 그린델발트에서의 고요함과 적막함이 나에게 풍요와 안정감을 줬다면, 도시의 고요함은 외로움을 준다. 이 곳이 비록 큰 도시는 아니지만, 내 주변에 사람이 있어도 느끼는 외로움은, 고독한 것이다. 나보다 더 고독한 알프스에서 혼자 있을 적에는 느끼지 못했다. 그들 앞에서 나는 감히 고독할 수 없다.

 런던에서 여기까지. 트위터에 올린 사진을 찬찬히 보고 있자니 아쉬움이 남는다. 해본것보다 못해본것이 더 마음에 남는 것이다. 런던에서 뮤지컬을 한 편 더 보고 싶었고, 런던아이를 타고 싶었고, 파리에서 맛있는 프랑스 가정식과 코스요리, 마카롱을 먹고 싶었다. 인터라켄에 와선 융프라우호에 결국 가지 못했다. 그래도 런던에선 오페라의 유령을 봤고, 인터라켄에선 듬직하고 섬세하며 수줍은 알프스를 보았다. 얻은 것이 더 많은 여행이고 더 챙길것이 많은 여행이다. 모두 끝난 뒤에도 계속 이어질 여행이다.

 마음껏 이렇게 보고 싶은것을 보고, 글을 쓰고, 마음 놓을 수 있다. 나의 스물다섯살의 마지막 즈음은 이렇게 설기게 또는 단단하게 잘 여물고 있겠지. 가끔 스스로 좀을 내고 생채기도 만들면서. 그러나 언젠가는 빛날 것이라 다시 꿈꾸면서. 어쩌면 이런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게 아닐까. 헷갈리고 모르겠지만 애쓰는 것. 애쓰도록 내버려두고, 꾸밈 없는 것.  - 2013. 11. 15. - 일기 중에서


 이십대의 끝자락에서 이 글을 다시 보니, 기분이 묘하다. 여전히 헷갈리고 모르는게 많고 애쓰고 있어서, 이때의 나에게 해줄 말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해줬다니 참 고맙고 다행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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