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남들 Men of the Bench
여러분은 축구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아마 메시나 호날두, 손흥민 같은 스타 선수들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습니다. 2002년 4강 신화나 카잔의 기적 같은 추억을 되새기는 분들도 계실 것 같고요. 평소 축구를 관심 있게 보지 않는 분이라고 해도 적어도 축구가 공을 발로 차서 골대에 넣는 스포츠라는 것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공격수, 수비수, 골키퍼 같은 포지션에 관한 이야기나, 4-4-2나 4-2-3-1 같은 포메이션 내지 전술에 관련된 이야기도 꺼내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축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사실 축구라는 스포츠의 본질은 매우 직관적이기에 축구를 잘 모르더라도 경기를 즐기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포지션, 포메이션, 경기 규칙 등 축구 경기는 매우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런 요소들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이게 뭐지?’ 혹은 ‘이게 왜?’ 같은 상황이 자주 찾아오기 마련이죠. 그래서 앞으로 벤치남들은 축구를 이루는 요소들과 개념들에 대해 쉽고 자세하게 소개할 예정입니다. 여러분이 축구를 시청하고 즐기는 데 있어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축구 경기를 분석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는 바로 포지션(Position)이라 생각됩니다. 쉽게 말해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같은, 선수의 위치와 역할을 구분하는 개념이죠. 지금으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요소들이지만, 사실 현대 축구의 기초가 되었던 근대 시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환경의 변화 속에서 정말 다양한 포지션이 생기고 사라지기를 거듭해 왔습니다. (앞으로 이 다양한 포지션들을 칼럼을 통해 소개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상대편의 골대에 발로 공을 차서 넣어야 한다는 축구 자체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죠.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항상 골문 앞에서 공이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야 했고, 축구의 전술이 빠르게 변해가는 동안에도 이 포지션만큼은 언제나 자리를 지켜 왔습니다. 맞습니다. 축구의 여러 포지션 가운데 가장 처음으로 다뤄 볼 오늘의 주제는 바로 골키퍼(Goalkeeper)입니다.
골키퍼는 축구 경기에 참여하는 11명의 선수 중에서, 유일하게 경기 구역(Field of Play) 내에서 한정적으로나마 손을 사용할 수 있는 포지션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 진영의 페널티 박스(Penalty Box) 안에서는 공을 손으로 다룰 수 있죠. 골키퍼의 근본적인 역할은 Goal Keeper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골이 들어가지 않도록 골대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우리 골대에 공이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경기는 절대로 패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축구가 시작된 이래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골키퍼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은 바로 ‘공을 얼마나 잘 막아낼 수 있는가’, 즉 선방 능력입니다. 즉 미리 슈팅의 위치와 경로를 예상해야 하고, 선방을 실현해낼 수 있는 순발력이 있어야 하며, 공을 놓치거나 불필요하게 상대편에게 세컨드 볼(Second Ball)을 허용하지 않도록 공을 다루는 실력도 뛰어나야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필드의 선수들을 활용하여 슈팅의 각도를 최대한 좁혀야 선방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특히 수비수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지시를 하는 커뮤니케이션 역량도 매우 중요합니다. 생각보다 요구되는 능력이 상당히 많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능력만 좋은 골키퍼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거나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위고 요리스나 대한민국의 조현우 선수가 예전에 그런 경우가 있었죠.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능력이 추가로 요구되는 것일까요? 바로 빌드업(Build-up) 역량입니다. 빌드업은 쉽게 말하면 공격 전개인데요, 즉 이 말은 골키퍼도 팀이 공격을 전개하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페널티 박스 바깥으로 공을 보내기 위해 발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기도 하죠. 과거에는 이런 능력이 별로 요구되지 않았습니다. 골키퍼는 손만 잘 쓰면 됐으니까요. 1980년대에만 해도 골키퍼는 손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포지션이었습니다. 골킥을 제외한다면 발을 굳이 쓸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수들이 상대방의 공격을 지연하기 위해 골키퍼에게 백패스를 하면, 골키퍼는 손으로 느긋하게 잡고 있다가 다시 멀리 공을 보내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1992년 백패스 규정이 바뀌고 이 전략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골키퍼에게는 새로운 능력이 요구되게 됩니다. 이제 골키퍼도 경기 도중에 손뿐만 아니라 발도 많이 사용해야만 하게 된 것이죠.
축구 경기 도중에는 여러 전술적 상황이 발생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골키퍼는 상대 팀과 접촉한 볼이 골라인 밖으로 나갔을 때, 그리고 팀 동료가 발로 패스를 건네주었을 때 발로 공을 처리해야 합니다. 여기서 골키퍼가 그냥 최대한 상대편의 골대에 가깝도록 공을 멀리 처리하는 것이 최선일 것 같지만(1992년 백패스 규정이 변경되었을 당시에도 이 결정이 롱볼 축구를 야기한다는 우려가 컸습니다), 현재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강팀 중 무조건적으로 킥을 길게 처리하는 경우는 드문 편입니다. 그 이유는 현대 축구에서 볼의 ‘소유’ 개념이 매우 중요해졌기 때문인데요. 공을 더 오래 소유하고 안정적으로 더 많은 패스를 가져간다는 것은 볼을 소유하는 팀이 경기의 흐름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고, 흐름을 가져간다는 것은 경기의 방향을 그 팀이 원하는 쪽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요, 공을 더 많이 그리고 오래 소유할수록 많은 공격을 시도할 수 있고, 더 많은 공격은 더 많은 슛을, 더 많은 슛은 더 많은 골을 의미할 확률이 높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 들어서는 골키퍼가 골킥을 그냥 멀리 처리해서 소유의 기회를 상대에게 넘겨 버리는 것이 굉장히 비효율적인 행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을 짧게 패스만 하면 되는 건데, 그 정도의 발기술은 축구선수라면 다 할 수 있는 거니까 빌드업 능력이란 골키퍼라면 다 가지고 있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답니다. 높고 멀리 띄우는 킥은 상대방이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지만, 공을 짧게 처리한다는 것은 상대 선수가 골키퍼를 압박해 공을 탈취하기 더 좋은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골키퍼는 매우 빠른 템포의 압박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공을 필드 플레이어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야만 합니다. 현대 축구에서 마누엘 노이어(바이에른 뮌헨)나 에데르송(맨체스터 시티) 같은 골키퍼들이 각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선방능력을 기본적으로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필드 플레이어 못지않게 탈압박에 능하고 패싱의 센스나 정확도도 높기 때문이죠.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골키퍼가 아예 필드 플레이어처럼 행동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브루스 그로벨라나 호세 이기타 선수처럼 전진하는 성격의 골키퍼가 존재하긴 했습니다만, 전통적인 골키퍼의 이미지는 분명 골대에서 제 자리를 지키는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라볼피아나를 필두로 한 빌드업 위주의 전술이 발전하게 되면서, 골키퍼는 단순히 수비수에게 공을 건네주는 역할을 넘어 직접 후방에서 중원 쪽으로 공을 전달하는 빌드업의 시발점으로까지 그 중요도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수비수가 후방을 골키퍼에게 맡기고 라인을 끌어올리면서 중원에서의 볼 점유에 가담하고 공격 상황에서 수적 우위를 점하는 게 가능해지기 때문이죠. 대신 수비의 라인이 올라간다는 것은 그만큼 뒷공간이 커지고 상대 공격수와의 일대일 상황이 발생할 여지도 많아진다는 뜻이기에, 골키퍼의 수비 방식 역시 슈팅 각도를 좁히거나 공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골대를 비우고 전진하는 빈도가 높아지는 식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현대 축구에서는 골키퍼가 전통적인 골키퍼의 역할뿐 아니라 최종 수비수, 그리고 공격의 시발점 역할까지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스위퍼 키퍼(Sweeper + Goal Keeper)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이런 유형의 선수는 ‘가짜 1번’이라는 뜻인 ‘폴스 원(False One)’이라고 묘사되기도 하죠. 앞에서 언급한 바이에른 뮌헨의 노이어 선수가 이런 스위퍼 키퍼의 대명사이며, 나아가 이 모델의 완성형을 제시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축구 전술의 대원칙 중 하나는 실점하지 않으면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공격을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는 것이죠. 최근 점유율 기반의 축구에서 역습 기반의 축구로 현대 축구의 헤게모니가 바뀌어 나가는 추세입니다만, 골키퍼의 전술적 중요도는 결코 낮아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티키타카든, 게겐 프레싱이든, 어떤 전술이든 간에 수비와 공격에서 골키퍼를 거치지 않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골키퍼는 점점 더 많은 능력을 요구받고 있고, 그만큼 골키퍼의 전술적 활용도 역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골 키퍼라는 이름마저도 편협하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는 이 포지션이 앞으로 또 어떤 변화를 마주하게 될지 기대될 따름입니다.
Written By 문세찬
Edited By 배기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