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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asson Nov 07. 2023

L에게 보내는 편지

#08. 몰타살이, 성난 파도? 신난 파도?

2023. 09의 어느 날 쓴 편지

리나에게,



오늘은 바람이 세게 불고 성난 파도가 인도까지 침범하는 폭풍우가 있는 날이었어.

아침에 등원할 때에는 바람이 불긴 했지만 선선한 바람이었거든.

오후가 되니 바람이 더 거세졌더라고. 간간히 비도 내렸어.

어린이집에서 너를 데리고 바닷가 쪽 길로 걸어서 집으로 오는 길이었지.


네가 이리저리 요동치는 바다와 매서운 파도들을 바라보더라고.  

네가 귀여운 검지손가락으로 바닷가 쪽을 가리키며 '워터!'라고 말했어.

그래서 나는 너에게 이렇게 말했어.


"리나야,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바다가 화가 났나 봐.
바위로 파도가 세차게 부서진다."


너는 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미간을 팍 구기고는

바다를 쳐다보며 너만의 언어로 뭐라 뭐라 말하더라고.

그 순간,  

네 미간에 잔뜩 낀 걱정과 근심 어린 인상을 보고 나는 생각에 잠겼어.


내가 말해주고 가르쳐주는 것들로부터 세상을 가장 처음 배우고,

받아들이는 단계일 텐데.

행여 내가 아무 의심 없이 하는 말들이

너에게 결국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닐지 말이야.

너는 지금 무한한 가능성과 여백을 가지고 있는 씨앗을 품고 있는데,

내가 오염된 물을 주거나

온도 및 습도 관리에 실패해서

싹도 피워보지 못한 채 시들어 버리는 게 아닐는지.



예를 들어 말이야.

'리나야, 바람이 정말 세게 분다. 바닷물이 신이 났나 봐.
열정적으로 파도를 쳐대는구나!'

라고 말해줄 수도 있었지 않았냐는 말이야.

세게 부는 바람에 화가 난 바다. 성난 파도들.

부정적인 표현들 말고 세게 부는 바람에 신이 난 바다.

열정을 태우듯 부서지는 파도들.

두 번째 표현이 조금 더 긍정적으로 들리잖아.

그렇지만 나는 네가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바닷가에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컸거든.


너에게 부정적으로 말해줘야 네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엔 바닷가에 가지 말자'라는 인식을 가질 것 같니까.

혹시라도 내가 바람이 많이 불어서 바다가 신이 났다고 말했다가,

너의 뇌리나 무의식의 영역에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엔

바다도 나도 파도도 신이 나는 날'이라고 각인되어 버리면,

나는 평생을 마음 졸이고 살지 않을까?

혹시 바람이 불어 신이 나 파도가 세차게 부서지는 바닷가에라도 갈까 봐 말이야.


너는 겨우 21개월 아기인데, 나도 참 저 멀리 갔구나.

하지만 너를 키우고나서부터,

일련의 모든 사소한 사건 사고들은 나를 아주 저 먼 곳까지 데려다 주곤해.

고작 작은 해프닝일 뿐인 일도, 작은 말실수로도,

끊임없는 시나리오들을 생산해 내지.

너는 내 머릿속에서 이미 몇 만 번은 20살이 되었고,

30살이 되었고 60살 70살이 되곤 해.


너는 내 이런 쓸데없는 걱정들을 한 손으로 가볍게 휘젓고는

더욱 지적으로 더욱 명석하게 자라나겠지.

나의 말도 안 되는 걱정들을 비웃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거겠지.


'엄마, 바람이 정말 세게 분다. 바닷물이 갈피를 잡을 수 없나 봐. 갈길을 잃은 바다가 파도가 되어 바위에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이 정말 안쓰럽다'


또는


'엄마, 바람과 바다가 서로 사랑하나 봐. 바위에 세차게 부딪혀 하얀 포말로 사라지는 모습이, 오랜만에 만난 연인들의 서로를 향한 열망들로 보여'

 

등등의 더욱 입체적이고 심도 있는 너만의 감상들로 말이야.

또는 그냥 아주 평범하고 실질적인 감상.



'엄마, 밖에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어, 나 학교 못 가'






폭풍이 오기 전 날 찍은 바다사진


네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수박씨를 먹으면 뱃속에서 수박이 자란다고 말해줬었어.

또 음식을 남기면 나중에 내가 남긴 음식들을 다 먹어야지만 천국에 문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해줬었어.

나는 그 장난스러운 농담의 저주에 꽤 오랫동안 걸려있었어.

꽤나 오랫동안.  


뭐, 물론 지금은 당연히 수박씨를 그냥 먹지. 귀찮으니까.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저주에 걸려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만.

내가 이렇게 별것도 아닌 일에 저 멀리까지 갔다 오는 건,

쩌면 네 할머니 할아버지 때문일 수도 있겠다.




파도가 화가 났, 바람이 신이 났던, 바다가 사랑을 하,

이들은 앞으로 너의 마음속에 너만의 감상, 색깔, 냄새 등으로 기억되고 조각되겠지.

우리가 함께 파도를 보고 각자의 감상을 얘기할 있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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