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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asson Mar 22. 2024

L에게 쓰는 편지

#13 자꾸 화가 나는 못난 엄마, 신경 못써서 미안한 뱃속 둘째에게

2024.03.22

둘째에게,


안녕?

아직 네 이름을 정하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둘째'라고 부르는 점 이해해 주렴.


이건 12주 차 때, 네 모습

임신 20주 차야.

너는 아주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잘 자라주고 있단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걱정하면 그날 저녁 열심히 발길질로 너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더라.


밤에만 태동이 활발한 거 보니, 혹시 잠을 안 자는 아이는 아닐까?

살짝 걱정이 들곤 해.

누나는 7시면 자러 들어가는 새나라의 아이거든.


요즘 나는 참 네게 미안한 감정만 들더라.

네 누나를 임신했을 때에는 많은 것을 조심했었어.

좋은 음악을 들으며 산책을 하고, 조용히 힐링하는 시간을 갖고,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거든.

물론 일을 하고 있어서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있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지.


네 누나가 지금 두 살, 27개월인데

활동량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고,

말도 많고,

울음도 많고,

웃음도 많고,

말도 오지게 안 듣고,

떼도 엄청 부릴 때거든.


그리고 네 누나는

내 뱃속에 아직 본인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해.

'아기'가 있다는 것은 아는데,

그 이상의 추상적인 개념은 당연히 이해 못 하지.

예를 들면, 나한테 계속 안아달라고 조른다

같이 몸으로 놀다가 내 배에 그냥 몸을 던진 다던지.

자신이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은 당연히 몰라.

그래도 가끔 '아기' 자냐고, '아기' 밥 먹냐고 물어보긴 하더라.


네 누나가 안아달라고 떼를 부리면 나는 안아줘야 해.

네 누나가 물건을 떨어트리면 나는 그것을 주워야 해.

네가 뱃속에 있으니 최대한 조심하려 하지만

가끔 나는 네 누나를 안고 뛰어야 할 때도 있어.

네 누나는 좋은 음악을 들으며 태교를 했는데

너는 네 누나 울음소리로 태교를 하고 있다.


그래도 네 누나는 울음을 금방 그치는 편이야.

잘 웃기도 엄청 잘 웃어서 깔깔깔 거리는 소리도 많이 들었을 거야.


네 누나가 내 말을 안들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네 누나한테도 좋은 소리가 안 나가고

뱃속에 있는 너도 고스란히 내 스트레스와 화를 느낄 테니

정말 하루하루 화, 죄책감으로 범벅이 되어있단다.


그래도 네 누나가 어린이집에 가있는 동안

집안일을 끝내놓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힐링을 해.


이 6시간은 내게 주워진 금쪽같은 태교의 기회거든.

네 누나가 잠들고 나서는 나도 너무 피곤해서 네 아빠랑 멍하니 티브이만 보고 있거든.

내가 체력이 참 좋은 사람인데,

확실히 뱃속에 사람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 그런지

시도 때도 없이 졸리네.


어제는 수영 고작 30분 했다가

하루종일 잠만 잤단다.


그래도 네 누나를 보며 느끼는 행복감과

네가 태어나고 나서 둘이 함께 지낼 모습을 상상하며

최대한 긍정적이고 행복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 중이야.


너는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울까.

네가 네 누나보다 더 울고 더 떼를 부릴 수도 있겠지.

네 누나는 든지 다 잘 먹었는데 너는 입이 짧을 수도 있고

잠을 안 자는 아이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미리 다 생각해 보며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어.


그래도 네가 얼마나 사랑스럽겠니.

우리의 작은 분신이 이렇게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걸

네 누나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래서 너를 준비하고 세상에 맞이할 준비를 한 건데,

너가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복이겠어.


네 누나가 태어난 이후로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어.

나는 더 이상 젊고 탱탱하고 아름다웠던 아가씨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어.

아이가 없던 삶의 편리함도 이제는 더 이상 느낄 수 없어.

자유롭던 몸도 이제는 너희에게 묶여있어.

내 몸은 많이 망가졌고 뱃가죽엔 징그러운 튼살들이 가득하지.

벤티사이즈 방광으로 유명했던 대용량 방광도 이젠 재채기만 해도 찔끔 실례를 할 만큼 망가졌어.


그런데,

나는 절대 네 누나가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네가 태어나면 더욱더 내 자유가 없어진 다는 걸 알면서도

절대 후회하거나 번복하고 싶지 않아.

다시 탄력도 되찾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데? 돌아갈래?라고 악마가 와서 속삭여도

나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나는 네 아빠에게 반해서 결혼한 거지만

가끔은 너희를 만나기 위해 네 아빠랑 만난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어.


너희에게 올인해서 내 모든 걸 포기하고 키우겠다는 소리가 아냐.

너희 키우면서 할 일 내가 알아서 잘하고 있고

너희 독립하고 나면 그때 다시 온전히 스스로에게 집중할 테니

지나고 나면 다시 오지 않을 매 순간순간을 현명하고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너희를 키우며 분명 힘들고 좌절하는 순간들이 자주 찾아오겠지만

내가 부디 잘 헤쳐나갈 수 있기를 바라.

너희를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기를 바라.

너희를 행복하고 건전한 사람으로 키울 수 있기를 바라.

미흡하고 부족한 나를

너희들이 믿고 따라줄 수 있기를 바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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