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을 단정하게 갖추고 키가 180cm쯤 됨직한 젊은이가 부장 걸음을 세웠다. 명일 지하철역 출구를 막 빠져나오고 있을 때다. 눈이 엄청나게 온다. 앞이 안 보일 지경이다. 퇴근 시간이다. 차를 끌고 갈 자신이 없어 지하철을 타고 온 참이다.
"저는 건축 설계사무실 사람입니다."
(설계사무실? 설계사무실에서 요즘 길거리 수주를 하고 있나? )
부장이 잠시 주춤하는 동안 그는 명함을 준다.
건축사 M.
" 지하철에서 아가씨 두 사람과 함께 계셨지요? "
" 그래서?"
" 그중 한 아가씨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서요."
아하, 회사를 나올 때 함께 퇴근하던 김 주임과 동료 여직원을 두고 말 하누나.
그가 말하는 아가씨는 긴 머리 날리며 눈빛 초롱 한 김 주임이다.
" 유감이오. 그 아가씨는 날 받았다오, 5월로."
별 실없는 사내에게 한 방으로 끝나게 할 참으로 부장은 선을 긋는다.
(날은 무슨 날, 참 별난 친구로군.)
"미안, 나는 갑니다."
눈 오는 날에 회사 이런 일로 더 들을 시간이 내게는 없다.
" 죄송합니다만 명함을 얻을 수 있는지요?"
상대가 정중하니 부장이 마다할 수가 없다. 명함을 주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명함을 잘못 준 것 아닌가?
내심 켕겼다.
이 일로 끝난 줄 알았다. 며칠 뒤 전화가 온다.
" 기억나실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지하철에서... "
" 기억나다마다. "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는 건축의 행정고시라 할 건축사라고 명함에 찍혀 있다. 진짠지 가짠지는 건축사 협회에 알아보면 금세 알 일.
" 거래하는 건설회사는 어디요?"
부장 회사와 거래하는 곳과 이름이 유사해서다.
" 병원 설계를 주로 합니다."
아니었다.
" 토요일에 시간이 어떻겠습니까? 한 번 점심 사러 가겠습니다."
점심때 식당 안 김 주임은 경리부 직원 틈에 섞여 있었다.
" 지하철 얘기 들었지? 내가 볼 땐 성실하게 보였어. "
" 다 들었어요. "
" 인기 많은 김 주임과 못 다니겠다."
그녀가 웃는다.
몇 달이 지났다.
퇴근길을 가면서 김 주임이 말한다. " 부장님과 공무 부장님과 퇴근길에 함께 가는 일도 며칠 안 남았어요. 부장님께서 술 석 잔 사드릴 일이 있어요. "
" 무슨? "
" 저, 결혼 날자 잡았어요. "
" 어허 그래? 축하 축하. 신랑은 누군데? 한동안 파다했던 그 사람? "
" 아네요. 부장님이 중매를 서주셨잖아요. "
" 내가, 언제? "
" 눈 오던 날. 지하철에서 만났던 그 사람요. "
" 아하아아"
부장은 설계 사무소 소장을 단박에 기억했다. 회사까지 찾아왔고, 함께 점심했다.
건축사 청년은 김 주임을 보자마자 콩깍지가 씌웠다.
그는 시간 중에 전화 걸어 김 주임의 귓가에 있었고, 퇴근 때는 회사 문밖 장승이었다.
" 그 사람이 별로예요."
하면서 김 주임은 먼저 사귀던 사람을 계속 만나는 듯했다.
웬일로 별로라던 사람 대신에 그 지하철 맨과 결혼을?
" 김 주임은 싫다고 했잖아?"
" 남자가 적극적이니까 저도 마음이 흔들린 거지요. 집안 어른 들게 인사를 다하고 양가에서도 다 좋다고 했어요."
" 결혼식은? "
날짜를 잡았다고 했다.
결혼 후 김 주임은 회사를 그만두었다.
부장 휴대폰에 문자가 뜬다.
김 아무개(경리) 본인 별세
신촌 어디 병원
발인 : 언제
연락처 : 010-1234-0000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디 회사 모임 회장 아무개
김 아무게는 김 주임이다. 결혼 한 지 2년째다.
신촌 어느 병원 영안실이다.
"무슨 일이오?"
부장은 남편 손을 잡는다. 그의 눈에 초점이 없다.
"부장님 오셨군요. 애 낳다가 그냥 애만 두고 갔습니다. 회사 근무 중에 아주 힘들었다 했지요. 바로 위 경리과장이 자금 횡령하고 잡혀갔었지요. 그 아래 우리 집 사람이었으니 경찰에서 오라 가라 힘들었답니다. 경리 과장 단독 범행으로 아내는 무혐의였어요. 회사를 그냥 다녔어요. 딱히 다른 곳에 갈 곳 없고. 경리 부장이나 중역들이 아꼈으니까요.어디 마음이 편할 리가요. 그 일로 공황 장애와 만성피로증후군에 시달렸다네요. 하루 일과가 끝날 무렵에는 거의 퇴근길에 집에 가기가 힘들 때가 자주 있었답니다. 택시 타고 퇴근할 형편은 아니었지요. 근처에 사는 동료 직원은 부장 님 두 분뿐이었고요. 그때마다 부장님과 공무 부장님에게 퇴근길 같이 가자고 청을 넣었답니다. 본인도 자주 부장님들 차 타기가 미안해서 택시를 타고 퇴근하기도 했답니다. 두 분께서 싫은 내색 없이 돌봐 주셔서 늘 고마웠답니다. 물론 번거롭고 귀찮으셨겠지요. 본인이 아프니 집안 친척 어른에게 떼쓰듯 응석도 부렸답니다. 자주 이야기했어요. 그런 분들이 없다고요. 부장님, 새삼 제가 감사 말씀드립니다. 저 사람도 지금 부장님을 뵙고 반가워하는 것 같습니다. "
영정 속 김 주임이 활짝 웃고 있다.
그래그래 김 주임은 과장이 사고 치고서 회사 전체가 시끌벅쩔할 때 엄청 힘들어했지.
부장은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설계 사무실을 하지만 영세 업자예요. 집 사람이 결혼하고서 제 사무실에서 경리와 관리 업무를 맡아서 했지요. 모든 것이 저는 부족했지요. 아내 마음고생은 직장 생활보다 더 심했어요. 퇴근 무렵엔 거의 쓰러질 정도로. 몸이 많이 약해졌어요. 그래도 아이가 생겨 기뻤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