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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종원 May 30. 2020

내 사랑 만년필

만년필 사랑은 인생 사랑이다


하늘 아래 것이 온통 디지털 세상인 듯하다. 

방안에도 디지털기기와 디지털 기운이 가득 차 있다. 

무선 인터넷과 블루투스, 무선 전화의 전파가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디지털의 태양이 빛날수록 아날로그 제품에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그 중 만년필에서 디지털을 벗어나는 여유를 느낀다.


만년필로는 나와 남을 다 표현할 수 있다. 사람에 따라 자기 자신을 더 자세하게 쓸 수 있는 거울과도 같다. 만년필은 품 안에 넣고 다닐 수도 있고 잠자리를 함께할 수도 있다. 잠자리가 아무리 불편하여도 불평 한마디 없다.


돈 덜 들이고 재미를 짭짤하게 보는 게 실용적인 경제 원리다. 그렇다면 만년필은 짭짤하기엔 간이 덜 들었다. 입이 딱 벌어지게 비싼 만년필로 글을 쓴다고 몇백 원짜리 볼펜보다 글씨가 더 잘 싸지지 않고, 볼펜으로 한 줄 글을 쓸 때 만년필로 열 줄 글을 쓸 수는 없다.


볼펜처럼 아무 데서 꺼내 쓸 수 없으며, 연필처럼 썼다가 지울 수 없으며, 세라믹 펜처럼 물 흐르듯이 써지지 않는다. 만년필은 길에 서서, 시끄러운 놀이동산에서 놀면서, 쉽게 꺼내 쓸 수 있는 필기도구는 아니다. 차분하게 앉아 만년필에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의 잉크를 먹이고 잉크를 잘 받아들이는 종이 위에서만 글씨를 제대로 쓸 수 있다.


깜박 만년필을 놓쳐 바닥에 떨어트려 촉이라도 부러지면 만년필 값의 반이나 되는 돈이 나갈 지경이 되면 공황장애라도 생길 판이다. 더구나 잉크를 넣은 지 한참 묵혔다가 남 앞에서 만년필을 꺼내 '폼샘폼사'를 연출한들 글씨가 제대로  못 쓰는 '죽'을 쓰게 하는 까다로운 애물단지다.


사랑한다고 품에 안았으나 부려 먹기엔 버거운 게 만년필이다. 그래도 슬금슬금 만년필 갖는 인구가 늘어난다. 요즘 남자의 로망과 여자의 낭만은 만년필이란 말은 어느 정도 맞다. 로망과 낭만은 다 단맛 쓴맛을 보겠기에 말이다. 셜록 홈스의 작가 코난 도일은 파카 듀오폴드 쓰면서 '만년필은 지성인의 소장품'이라며 지성인과 만년필을 짝짓기했다.


사전의 뜻으로 지성이란,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 넓은 뜻으로는 지각이나 직관(直觀), 오성(悟性) 따위의 지적 능력을 통틀어 이른다. 세상 돌아가는 이것저것이 뭔지 알 만큼 정신이 제자리에 똑바로 박힌 사람이면 만년필을 쓸 만하다는 말이다. 만년필을 쓰는 사람이 지성인이란 말은 자신이 지성이 있고 없고를 떠나 기분은 괜찮다.


값보다 용도는 아주 비실용적인 만년필이나 그와 달리 놀라운 경제성이 있다. 만년필을 사는 게 손해 보는 장사가 절대 아니다. 친구 중 누군가 지금 최신형 컴퓨터를 산다. 같은 때 나는 그 값만큼 하는 만년필을 산다. 10년쯤 뒤에 친구의 고물 컴퓨터는 제값은커녕 웃돈까지 내서 버려야지 남에게 준다고 하면 욕바가지 깜이다.


그렇다면 만년필은 어떤가. 나는 10년 지난 만년필을 버리려 들지 않을 뿐 아니라 만년필을 남에게 주겠다고 하면 기꺼이 받을 사람을 언제나 줄 서 있다. 하다못해 팔겠다고 중고 시장에 내놔도 샀을 때 값은 건질 수 있다.


컴퓨터와 만년필의 차이점은 아주 간단하다. 컴퓨터는 어제가 옛날인데 만년필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구태의연' 하지만 더 값이 나간다. 어제의 만년필은 메모리가 1기가였는데 오늘은 2기가로 바뀌지 않고, 어제의 만년필은 하드 디스켓이 100기가였는데 오늘은 200기가로 바뀌지 않는다. 만년필에서 바뀌는 건 '야시시하게 뽀다귀' 나는 디자인뿐이다.


잉크 넣고 글 쓰는 동작은 만년필이 처음 나올 때나 지금이나 똑같고 앞으로도 일편단심 민들레일 것이다. 그러니 없는 살림에 만년필 하나쯤 갖는 사치는 참으로 경제적이다. 어떤 초콜릿 주는 날에 초콜릿 나눠 먹을 돈으로 산 만년필을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다. 형편이 되면 손목에 힘 들어가는 만년필이 좋지만, 초콜릿값만큼 하는 만년필 역시 쓸 만하다. 비싼 만년필을 가진 사람들도 값싼 만년필에도 '뿅' 간다. 만년필마다 펜 맛이 다르니까. 마치 그 기분은 애인이 곁에 있어도 지나가는 멋진 이성에게 눈을 파는 그런 기분이라 할까.


만년필은 '그리움의 근원을 회복'하는 도구이다. 바쁜 생활에 쫓기다가 짧은 여유가 오면 만년필을 뽑아 든다. 한 자루 만년필이 손아귀에 들어오기 전까지 세월이 잠깐이나마 머릿속에 지나간다. 연필 한 자루, 볼펜 한 자루, 만년필 한 자루를 거치면서 다시 못 올 청춘과 더불어 한평생이.

뭔가 까칠한 이 필기구가 요즘 흔한 디지털과 달리 불편해도 정다운 이유가 머릿속에 의문부호를 잠깐 남기기는 한다 어느 작가가  만년필로 쓴 기나긴 강을 흐르는 듯한 여러 장편 대하소설에는 지난 시절에 한 서린 사람들이 겪은 즐겁고 슬펐던 일, 한을 품고 떠나서 돌아오지 못한 선대의 울음이 가득했다. 그 시절 사람들은 오지 못한 날들 속에 묻혀 있지만, 그 시절 그 일들은 다시 이 시대에도 일어난다. 생각하면 우리 또한 기나긴 강을 건너고 있지 않은가.

슬프고 기쁜 일을 만년필 글씨로 쓸 때 느낌이 더 강하다. 마치 그리움은 밤의 어둠과 같다. 아침이 오면 다시 밤이 오듯 그리움 또한 같다. 컴퓨터 자판으로 찍는 똑같은 바탕체, 돋움체는 만년필의 손글씨로 쓴 감동의 무게가 아주 다르다. 젊은이는 젊은 손글씨로, 늙은이는 늙은 손글씨로, 제 나이 먹은 글씨 속에 늙은이는 한평생이 지금은 그립게, 젊은이에게는 청춘이 회복한다.

그리고 지킬 수 없는 계획을 쓰며, 완성된 계획에 체크한다. 만년필 글씨는 길을 가면서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쓰는 휴대전화처럼 부산하거나 바쁘지 않다. 자기 자신과 마주 앉아 디지털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서 여유를 갖고 자기 자신을 적어간다.

 이렇게.

 한평생을 살면서 슬펐지만 기뻤다.

남은 인생도 눈물만큼 기쁨도 있겠지.

가끔은 이루어질 소망도 써가면서.


컴퓨터가 포맷되면 모았던 기록도 함께 포맷된다. 포맷이 없는 만년필 글씨로 쓴 일기장이나 책갈피에 적었던 메모 한 장이 먼 훗날까지 남는다. 문득 눈에 뜨이면 만년필 펜 끝에 담았던 순간이 떠오른다. 짭조름한 감상은 만년필로 글씨를 써 본 사람이면 안다.

만년필이 비싸거나 싸거나 아무 관계 없이. 어느 날 책꽂이에서 아버지의 일기장이 잠을 깨고 나왔다.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아버지는 한때 낡은 일기장에다 만년필 글씨 몇 줄을 남겨놓았다. 딸은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펼치고서 금세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시울이 젖는다.


딸내미야, 너는 내게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가지고 왔느냐. 새벽까지 네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다 너의 모습을 보고서 돌아눕던 이 아비가 내뱉던 안도의 한숨을 너는 번번이 놓치고 마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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